석굴암

본존불 


본존불 치수.크기본존불의 치수는 당나라 현장이 ‘대당서역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인도 보드가야 대각사의 크기와 비례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본존상의 크기와 비례에 의해 석굴암이 건축되었다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는 일본의 건축 사학자 요네다 미요지의 본존불 치수가 석굴암 전체의 비례에 의해 산출 되었다는 견해와 다를뿐 아니라 석굴암의 기원을 밝히는 결정적 단서로 보인다


강우방씨는 ‘인도의 비례이론과 서굴암 비례체계의 적용시론’ 에서 이와 같은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인도 대각사의 성도상의 크기는 물론 圖像과 방향이 석굴암의 본존과 같다는점에서 석굴암이 인도 비례이론을 따랐음을 고증하였다. 석굴암과 대각사의 치수의 척도는 唐尺이며, 두상의 총높이와 두무릅 사이의 거리가 각각 1장1척5촌, 8척8촌으로 같은 규격임을 밝혔다.
본존상호의 길이는 12디지트에 해당하는 인도의 치수단위인 1딸라와 일치 된다. 1디지트는 인도 경전상에 나타나는 기본단위로 손가락 하나의 폭을 의미하는데 그는 이 길이가 5.5cm에 해당 한다는 것을 오른 손바닥 폭을 넷으로 나눔으로써 얻었다. 따라서 육계에서 턱까지의 상호 길이는 66cm(72촌)이며 얼굴의 길이와 폭이 같고, 입의 길이 ,젖꼭지사이의 거리, 손바닥의 폭, 엄지의 길이, 팔뚝의 길이 등도 인도의 비례이론과 일치한다고 강우방씨는 증명하고 있다.
이 학설의 입증 근거는
— 두팔의 간격과 부처님의 신장이 같은데 이는 석굴암의 원형 광장의 직경 7백27cm(24당척x약30.3cm)와 같다.
— 본존의 머리 정상과 연결되는 머리 중심으로 부터 방사되는 선들이 돔의 쐐기형상을 결정한다.
— 원형주실의 직경과 높이는 본존불 불두의 8배가 된다.
— 원형주실의 높이는 4등분되는데 하나의 원은 본존두광의 직경과 같다.
— 본존위의 천개의 직경은 원형주실 직경의 1/4이다.
— 좌대포함 본존불의 총고는 아치형 입구의 높이를 결정 했다.
— 본존불의 두 어깨폭이 두 기둥사이의 거리를 결정했다.

석굴암 본존상의 방향

토함산에 세워진 석굴암은 동동남 약 30도 방향을 보고 있다. 멀리 동해바다의 수평선이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왜 정동(正東)이 아니고 약 30도를 남쪽으로 이동하였을까 ? 일본인들은 다만 석굴암이 위치한 지형적 편의로만 생각했으나, 석굴암의 조성에는 치밀한 조영계획이 있었으리라는 점은 그 건축구조와 여러 조상들의 배치에서 충분히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처럼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방향
1960년대 석굴의 대대적인 보수공사 총감독을 맡았던 황수영 박사가 이것은 문무대왕의 대왕암이 있는 동해구(東海口)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한 이래 지금도 많은 일반인들은 대체로 이 학설을 믿고 있다.

황수영 박사는 감은사가 있는 동해구 대왕암을 바라보는 시점과 비슷함에 주목하면서 신라에서는 왕릉 앞에 석불을 배치했던 예에 따라 조영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즉, 동해의 대왕암과 석굴암을 호국불교, 왜(倭)의 침략에 대한 수호, 진골 김씨왕조의 안녕을 비는 기복신앙,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설화 등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대왕암의 위치는 석굴에서 정확하게 바라보는 시점에서는 왼쪽(동쪽)으로 조금 밀려 있는 곳(0.9도)이다.어떤 이는 대략 그 방향이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석굴의 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무서울 정도’로 과학적이고 치밀했다.더욱이 석굴암과 토함산 정상 부근에는 대왕암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자리가 얼마든지 있는 것에 미루어 보아도, 이 견해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 가운데, 김원용 박사는 석굴의 위치 선정은 ‘호국용’이 아니라 어떤 정신적 성격일 것이라며 황수영 박사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69년도 석굴암 논쟁때 남천우 박사도 그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석굴의 정확한 방향은 대왕암(28.5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동짓날 해뜨는 방향(29.4도)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점은 석굴암의 방향에 관한 정확한 견해라고 보여진다.왜냐하면, 고래로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동짓날을 한해의 끝이 아니라,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래서 동짓날 아침에는 해뜰 때에 왕과 신하들이 뜨오르는 태양에 예배를 올려 그해의 안녕을 기원하였던 것이다.그런 점에서 보면, 신라인들은 석굴암 부처님이 한해를 시작하는 아침에 뜨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앉으시어 그의 위력으로 바다의 독룡을 제압하고 온갖 나찰(귀신)을 항복시켜 한해 내도록 나라와 백성의 평안과 안전을 지켜주시기를 기원하였을 것이고, 이렇게 보는 것이 석굴암의 석굴사원을 조성하게 된 연유에 비추어서도 자연스러운 견해일 것이다.

석굴암
십일면 관음보살상

십일면 관음보살상은 바로 본존 여래상의 뒷면 둥근 벽의 중앙을 차지하고 똑바로 서있다. 그 어느 조각보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석굴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존불 바로 뒤에 배치된 이 조각의 양식적 특성은 무엇보다 머리위에 작은 아홉개의 얼굴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한 관음이 있어서 본체와 합하여 십일면이 있는 관음 보살이란 점이다. 긴 몸에 섬세하게 표현된 천의와 온몸을 덮고 흐르는 영락(纓珞)은 정교한 귀걸이나 목걸이 등과 더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관음보살은 이 세상의 생명체 즉 중생이 이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곧 바로 그 소리를 듣고서 그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노력을 기우린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관음(觀音) 또는 관세음(觀世音),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보살이라고 불리우며, 그 의미는 “소리를 본다”는 뜻이다. 보는 소리는 사물의 내재적 진리를 직관하는 것이아닐까?본래 여래는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다섯가지 기관이 서로 그 대상을 바꾸어 작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하며, 명의(名醫)는 환자의 손을 만져보고도 그 병을 알고, 탁월한 연주자는 악보를 보기만 하여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음보살의 뛰어난 구제력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하여 관음보살은 천수천안(千手千眼)관음으로 나타나고, 중생의 고통을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얼굴이 11면이 되는 자비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3방면으로 3면을 나타낸 까닭은 욕(欲), 색(色), 무색(無色)의 3계(界)를 화(化)하기 위함이며, 이 11면을 본면과 합하면 12면이 되는데, 그 11면은 방편면이요, 본면은 진실면이라고 한다.이 방편면으로서의 11면 중 자비의 얼굴은 문(文)을, 진노의 얼굴은 무(武)를 나타내어 쌍을 이루는 것으로서, 선(善)한 중생을 화(化)하기 위해서는 다만 자비의 얼굴로써 하고, 악한 중생을 화하기 위해서는 진노의 얼굴로 악의 항복을 받으며, 선악이 뒤섞인 많은 중생을 화하기 위해서 폭대소면으로 악을 비웃고 가책하며 선을 칭송하여 복돋우며, 깨끗한 업을 닦는 이에게는 백아상출면으로써 그 정진을 찬양함을 상징한다. 즉, 11면 관음보살은 자비와 진노, 폭소와 분노로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함을 나타내고, 그 상단에 그 모든 것을 여위어 모든 불꽃을 꺼버린 열반에 든 부처를 표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석굴암의 11면 관음상은 현재 11면 중 2면은 상실되어 그 후 보수된 것이다.
십일면 관음보살의 상징과 의궤

보살
주실인 원굴에 들어서면 좌우의 천부상 다음에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첫번째 안치된 불상은 제석이며 그 반대쪽은 범천이다. 천부상 다음으로 좌우 벽에 새겨진 보살상은 왼쪽이 문수, 오른쪽이 보현보살상이다. 문수보살상은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서서 몸을 굴 안으로 향하였다. 보현보살상은 왼손에 경권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져 있다. 천부상과 더불어 이들 보살상은 석굴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문수보살상
文殊菩薩의 이름은 범어로 “Manjusri”를 한역(漢譯)한 것이고 만수사리라고도 하며, 묘길상(妙吉祥), 묘덕(妙德)이라고도 불린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후 인도에서 실재하였던 인물이며, “문수사리반열반경(文殊師利般涅般經)”에는 “사위국(舍衛國) 다라취락범덕 바라문(多羅聚落梵德 婆羅門)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경전에 따르면 단순히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등장하기도 하여 그 역사적 실재성은 분명지 않다. 그는 지혜의 공덕을 가진 보살로서 반야경을 결집, 편찬한 보살로 알려져 있다.”대방광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문수보살은 선재동자의 구도 여행을 통하여 보살도를 실천한다. 즉, 선재동자는 어떻게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는지 선지식을 구하려고 문수에게 묻고, 그 가르침에 따라 먼저 화합산(和合山)에 거주하는 비구를 방문하고, 그 뒤 비구니, 장자(長者), 왕, 선인, 유녀(遊女) 등 모든 계충의 사람들과 접하며 차례대로 구도여행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선재동자는 52번째 선지식 미륵의 가르침으로 다시 문수보살에게 돌아오는데, 그의 가르침으로 최후로 보현보살을 방문한 선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야말로 최고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찬탄을 듣는 것으로 ‘화엄경’은 막을 내린다.


보현보살상
普賢菩薩像은 범어로 “Samanthabhadra”로, 한자로는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라고 하며, “Sammandha”는 넓다는 뜻으로 덕이 두루 온누리에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문으로 “보(普)”라고 하는 것이고, “Bhadra”는 지극히 원해서 선(善)을 가다듬는 까닭에 한문으로 “현(賢)”이라고 하며, 그 이름은 보살행의 “넓게 뛰어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문수보살과 함께 보현보살은 고대 인도사상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은 것으로 불교의 순수한 보살상인데, 문수보살은 대승불교 초기에서부터 나타나고, 보현보살은 그보다 후기 경전에서 자주 등장한다. 문수보살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보현보살은 대행(大行)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수행의 과덕(課德) 그 자체를 하나의 이상적 행원(行願)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불교의 실천행의 상징이기도 하다. “대방광불화엄경”에서는 여러 부분에 보현보살의 덕행과 행원이 묘사되어 있는데, 특히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는 모든 보살도의 구극(究極)에 달한 보살로 표현되고 있어,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여래의 비밀처를 통하고, 일체 중생의 근기(根機)를 잘 알아 중생에게 해탈의 길을 잘 열어 보이며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설함에도 능한 무량의 덕성을 갖춘 보살이라고 한다.

천부상 
주실인 원굴에 들어서면 좌우의 천부상 다음에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첫번째 안치된 불상은 제석이며 그 반대쪽은 범천이다. 天은 광명. 청정. 자제. 최승의 뜻이 있다. 즉 호법신으로서 인도에 있는 여러 토착신이 불교에 흡수된 것이다. 따라서 밀교에서 天 속에 포함되는 것이 무수히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天은 범천, 제석천, 사천왕, 팔부중, 인왕, 가릉빈가 등에 불과하다.

범천(梵天)은
원래 인도의 바라문 교에서 매우 숭상하던 신이다. 불교에 포섭된 뒤에도 제석천과 주요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범천은 욕계(欲界)의 모든 욕심을 끊고 청정하며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깊이 믿으며 부처가 출세할때마다 가장 먼저 와서 설법을 듣는다고 한다.그 예는 무불상 시대부터 인도에 있었고 한 손에 불자(拂子)를드는 것을 격식으로 삼고 있다.


제석천(帝釋天)은고대 인도신화에서의 범천과 함께 대표적하는 신으로서도리천의 주인이며 수미산 위의 희견성이 그의 거처이다.석가모니의 생전부터 그를 도웁고 옹호하였다.

이들 천부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두광의 모습이다.마치 달걀을 꺼꾸로 놓은 모양의 이채로운 두광은 그 테두리를 구술을 엮은 連珠文을 돌려 장식하였다.범천의 의습은 보살상의 일반적 옷차림이나 제석천은 武服을 입고 그 위에 天衣를 늘이고 있다.

범천은 불자와 정병을, 제석천은 불자와 금강저를 각각 持物로삼고 있는데, 拂子의 뜻은 중생들의 더러운 때를 털어내는 털이개요,정병은 때를 씻어내는 깨끗한 물을 담는 그릇이요,금강저는 금강석의 이미지를 빌어 결코 부서지지 않는 지혜를 상징한다.

 

석굴암
나한상(羅漢像)

석굴 후벽 중앙에 십일면관음상을 안치하고 그 좌우에 곧이어서 각각 5구씩 나한입상을 배치하였다.본존불이 아미타불이냐 석가여래냐를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는 상태에서나한이 열분이 있다고해서 10대제자라는 단정은 제고해 볼 필요가 있다.여기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석가여래의 10대제자를 열거한다.
십대제자상(왼쪽)

 

제1상 제2상 제3상 제4상 제5상

1,사리불(舍利佛)………………지혜제일(智慧第一)
2,마하목건연(摩詞木蓮)……신통제일(神通第一)
3,마하가섭(마詞迦葉)……….두타제일(頭陀第一)
4,수보리(須菩提)………………해공제일(解空第一)
5,부루나(富樓那)………………설법제일(說法第一)
6,마하가 연(摩詞迦延)………논의제일(論義第一)
7,아나율(阿那律)………………전안제일(天眼第一)
8,우파리(優波離)………………지계제일(持戒第一)
9,라후라(羅 羅)…………………밀행제일(密行第一)
10,아난타(阿難陀)…………….다문제일(多聞第一)

오늘날 석굴암의 이들 열 분의 조상들은 통설에 따라 10대제자라고 하더라도, 어느 조상이 어느 제자를 나타내고있는지 쉽게 추정할 수는 없다.이들의 열 분의 조상은 주벽의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여좌우대칭을 보이고 있다.즉, 주실 후벽의 한가운데 서 있는 11면 관음보살상에 중심으로 두고 좌우 각 다섯 분이 배열되었는데 본존여래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십대제자상(오른쪽)
십대제자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들 얼굴의 다양한 표현이다. 긴 얼굴에 각기 다른 골상을 보이는 서구적인 모습의 이들 제자상은 모두 머리를 깎았으며 큰 코에 야윈 얼굴을 하고 있다. 자세 또한 정면 또는 측면의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의상의 모양도 서로 다르다. 경권, 향로, 정병 등 각기 손에 들고 있는 것에도 차별이 있어 여러가지의 특색을 보인다.

 

제1상 제2상 제3상 제4상 제5상

부처님의 10대 제자의 자세한 설명보기

석굴암
감실의 석상
석굴 주벽상의 위쪽에는 남북과 동으로 각각 5개의 반구형 감실이 배치돼 있다.
석굴과 잘 조화되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 이 감실은 동시에 공간의 확대효과도
느끼게 해주고 있다. 대부분 보살상인 이 감불좌상은 본존불의 바로 전방과 그
후방인 십일면관음상의 상면만을 피하고 그 나머지 벽면에 배치되어 하늘과
땅과의 중간에서 이 석굴의 영광과 장엄을 찬미하고 환희하는 것 같다. 조각
또한 주위의 벽에 있는 다른 여러 상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작품이다.

제1상 제2상 제3상 제4상

제1상 제2상 제3상 제4상

석굴암 감실의 “유마상”
석굴암 감실의 “지장보살상”
석굴암 감실의 “미륵보살상”

석굴암
사천왕상 前室과 主室을 잇는 통로인 扉道의 좌우 벽에 사천왕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부처님이 계신 주실에 이르는 길목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있다. 부처님을 향하여 오른쪽 벽에는 ‘동방 지국천’ 과 ‘북방 다문천’이, 왼쪽 벽에는 ‘남방 증장천’ 과 ‘서방 광목천’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다. 사천왕은 인도의 신화시대부터 護世神으로 숭배되어 왔으며, 불교에 들어 와서는 욕계 六欲天의 제1계인 4천왕천의 主神이 되었다.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중복의 동. 서. 남. 북 사방에 사천왕이 각기 머물면서 산꼭대기에 있는 궁전에 머무는 제석천을 받들면서 사방 四洲를 지키고 있는 신들이 사천왕이라 경전은 전한다. 본디 사천왕은 인도에서는 온건한 표정으로 보살에 가까운 모습이었는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오면서 오늘날처럼 갑옷을 입고 분노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지국천지국천(持國天)
지국천은 드리다라쉬트라라는 인도어를 뜻옴김한 것으로’나라를 지킨다’ ‘나라를 다스린다’ 는 뜻으로 풀이한 말이다.지국천은 건달바와 비사도라는 귀신을 부리면서 東方을 지킨다.고대의 인도 베다(아타르바 베다, 마하브하라타 베다) 등 고문헌에 나타난 신화들에서는 지국천왕이 그 권속으로 ‘간다르바’를 부린다고 표현되어 있다.후대의 불경에서는 지국천왕이 ‘간다르바’나 ‘비사사’라는 귀신을 부리면서 동방에서 참된 도리를 파괴하고 선한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표현된다.’간다르바’라는 귀신은 향기를 먹고 사는 귀신이라고 하며, 그래서 중국에서는 심향(尋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비사사’라는 귀신은 사람의 정기(精氣)를 뺏는 탐정귀(貪精鬼)라고 한다.이런 ‘간다르바’와 ‘비사사’를 부하로 부리는, 동방지국천왕이 가지고 있는 물건(持物)에 대하여는 경전마다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 있다.다라니집경에 의하면, 동방지국천왕은 왼손에 팔을 내려 칼을 잡고, 오른 손을 구부려 보주(寶珠)를 쥔다고 하고, 일자불정륜경(一字佛頂輪經)에 의하면, 왼손에는 창, 오른손은 손바닥을 올려드는 형상이라고 하며,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 중 염송의궤공양법에는 비파(琵琶)를 든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불국사 천왕문의 목각 사천왕상중에는 이처럼 비파를 든 천왕이 바로 동방지국천왕이다. 시선이 동쪽으로 향하면서 힘차게 검을 잡은 오른손과 새끼손가락 표현, 왼손으로 살며시 검을 받혀든 모습에서 지국천의 심중한 심리묘사를 옅볼 수 있다. 다문천다문천(多聞天)
비사문천이라고도 한다. 북방을 다스리면서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며 부처님의 설법하시는 것을 많이 듣는다고 해서 다문천이라 불린다.석굴암 彫象에서 보는 다문천은 오른손에 보탑을 받쳐들고 있어존명을 밝히는 데 근거가 된다.고대 인도의 아타르바 베다에서는 지국천왕이 암흑계에 머무는 악령의 우두머리로서 재물과 복덕을 주관하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다문천왕은 권속으로 야차(Yaksa), 나찰(Raksasa)를 부리며, 야차는 행동이 민첩하고 가벼우며 음악과 환락,음식, 오락, 바람을 주관하며 숲속이나 묘지, 골짜기에서 산다고 하고, 나찰은 ‘두려운 존재’라는 뜻으로 혈육(血肉)을 먹고 탐내는 존재이다.다문천왕은 불교에 흡수되면서, 야차와 나찰을 부하로 부리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존재로 변화된 것이다.다문천왕의 지물(持物)에 대하여,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에 창을 잡고 땅을 짚고, 오른손에는 불탑(佛塔)을 든다고 하며, 일자불정륜경에는 왼손에 창, 오른손에 금강저를 든다고 하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왼손에 막대, 오른손에 탑을 든다고 하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얼굴이 검은 색으로 표현되기도 한다.왼손의 모습은 보탑과의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왼발 뒤꿈치를 살짝 들어 순간의 동적 리듬을 포착하고 있다.증장천증장천(增長天)
본존불을 향해서 왼쪽 벽에는 증장천과 광목천이 나란히서 있다. 주실쪽에 광목천이 놓였는데 광목천 대각선 쪽에 지국천이 있어 석굴암의 사천왕 배치는 동서. 남북 방향이 대각선 구성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비루다카라는 인도어는 ‘자꾸 늘어난다’ ‘자꾸 확대된다’ 는 뜻을 가진 말이므로 增長天이라고 한역된다. 증장천은 굼반다와 프레타라는 귀신을 데리고 수미산 남쪽 중턱에 자리한 유리(瑠璃)라는 곳에 머물며 불법을 지킨다 한다. 증장천왕은 그 권속으로 굼반다(Kumbhanda)와 프레타(Preta)를 부리며, 굼반다는 배가 매우 부른 모습으로 표현되어 욕심이 매우 많은 아귀라고 하며 ‘비사사’처럼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이라고 한다. 프레타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부리며 보통 6악도(惡道)라고 불려지는 중생들이 거처하는 아귀를 의미한다. 증장천왕의 지물(持物)에 대하여, 다리니집경은 왼손을 펴서 칼을 잡고, 오른손에는 창을 잡는다고 하며, 일자불정륜경에는 오른손을 허리에 대고 왼손에 창을 잡는다고 하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칼을 잡는다고 한다.광목천광목천(廣目天)
비루파크샤란 인도어는 ‘큰 눈을 가졌다’ 고 해서 廣目天이라고 옮기기도 하고,또 이상한 눈 , 추악한 눈을 가졌다’ 고 뜻에서 醜目 惡眼으로도 뜻옮김이 된다. 광목천은 수미산 서쪽 중턱에 있으며, 용과 富單那를 거느리면서 불법을 수호한다.현재 광목천의 얼굴은 板石에서 떨어진 것을 쇠못으로 붙들어 맸는데언제 그러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광목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시바(Siva) 신의 화신으로서 세 개의 눈을 가진데서 유래하며, 그 권속으로 여러 종류의 용(龍)과 부단나(富單那) 등이 있으며, 부단나란 냄새나는 귀신, 아귀를 말한다고 하며, 때로는 열병을 앓게 하는 귀신이라고도 생각된다.광목천왕의 지물(持物)은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에 칼 또는 창을, 오른 손에 붉은 밧줄을 들거나 손가락을 새끼처럼 꼬아든다고 하며, 일자불정륜경에는 왼손에 창을, 오른손에 금강저를 든다고 하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밧줄을 든다고 한다.
석조 사천왕상 불사자료

금강역사상
석굴암의 전실을 지나 비도(扉道)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양쪽으로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있다. 금강역사상은 다른 이름으로 인왕상(仁王像) 또는 야차(夜叉)라고도 한다.
금강역사란 언제나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한다. “근본비나야잡사경(根本毘奈耶雜事經)”에 의하면,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기원정사(祇圓精舍)를 세워 채화(彩畵)로서 장엄하려고 석가모니 부처님께 물었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이 ‘문의 양쪽에 집장(執杖)의 야차(夜叉)를 만들라’고 하신 것에 유래한 것이다.

 

아 역사상 훔 역사상
‘아’ 금강역사상 ‘훔’ 금강역사상

금강역사상에 대한 정식의 이름은 없으나, 일반적으로왼쪽에서 입을 약간 벌리고 있는 금강상을 ‘아’ 금강역사상이라고 하고, 오른쪽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금강상을 ‘훔’ 금강역사상이라고 한다. 범어에서 ‘아’는 첫글자이고, ‘훔’은 마지막 글자이다. 밀교(密敎, 顯敎에 대한 말로서 신비적이며 주술적인 불교를 뜻한다)에서는, ‘아’와 ‘훔’이란 바로 인체 에너지의 원형을 뜻하며 이 한 음절에 우주의 본체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다.

 

팔부신장(남측)
전실 남측에 배치된 팔부신장 중 4구. 여러 얼굴과 팔을 지닌 아수라 상을 비롯하여 이름미상의 2구의 상과 머리에 용을 얹고 있는 용신이 보인다.

 

제1 아수라 제2상 제3 간달바 제4 용

 

팔부신장(북측)
전실 북측에 배치된 팔부신장 중 4구. 불법신장의 신중인 팔부신장은 원실 밖인 남북에 서로 대립하여 서있다. 법의 대신 무복을 입었으며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있거나 동물상을 표시하여 그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

 

제1상 제2상 제3상 제4상

 

 

석굴암의 구조 경주 석굴암의 조영계획

– 요네다 미요지 (米田美代治) -1. 서설(序說)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때 석불사(石佛寺)로 창립된 것이라 전하여 온다. 지금 석굴암은 석불사(경북 월성군 양북면)의 중요한 구성부분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나 석불사 당초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청건때부터 계속되어 오는 현존 부분은 석굴본존, 기타의 제불(諸佛), 굴앞에 따로 놓인 석등의 대석(臺石), 남아 있는 약간의 주춧돌, 또 굴 동쪽 약 340척 거리, 산등성이에 남아 있는 원형기단의 3층석탑 등을 손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석굴은 그간 몇번의 수리가 있었음이 문헌에 보이며, 1913년에는 전면 해체, 수리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 석굴이 당초의 제 모습을 남겼다고는 할 수 없다. 단지 석굴 중요부분과 전실짜임이 성질상 이들 부분이 크게 달라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남겼으리라 생각되어 진다.

석굴암은 부도에서 보듯이 동남쪽으로 문이 열린 전방후원형 평면에 화강석재로 축조하였다. 전방(前室) 천장은 아-치형이고, 후원부 주실은 주벽을 두르고 그 위에 소감(小龕)을 설치하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 돌로 교묘하게 쌓아가면서 궁륭천정(돔)을 만들었다, 천장 중심에 연화무늬를 새긴 웅대한 돌을 놓아 본존상의 천개(天蓋)가 되도록 의도하였다.

본존상은 직경 23.6곡척(曲尺), 주실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자리에 놓인, 전고(全高) 16.69곡척의 거대한 연화무늬 대좌위에 결가부좌하였다. 둘레의 벽에는 11면 관음, 10나한, 여러 보살상, 천황상 등을 입상으로 고육조 또는 박육조로 조각한 판석을 나란히 맞추어 세우면서 정리되었다. 둘레벽 위로 다시 열개 소감(小龕)을 만들고 거기에 문수, 유마, 지장 등의 조상들이 안치되었다.

되풀이 할 것도 없이 석굴과 굴내제불은 신라통일시대 건축조상기술의 정수를 여기에 집중시켜 응결하여 조현하였던 할 수 있고, 당대 문화의 난숙함을 유감없이 구현하였다고 해서 과언이 아니다. 일찍부터 여러 사람이 여기에 주목하였고, 여러 논문들이 발표되었던 일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석굴, 불상구성에 대한 기초적인 해석에는 별다른 논고가 없었다. 이 일편은 바로 그 점을 규명하고져 뜻을 두고 집필하였다. 기초해명의 기술적 관점해석은 당연히 같은 시기의 불국사 등과 연관시키고, 통일신라시대 불사조영의 계획을 검토하고 그들 규거준칙(規鉅準則)을 탐색하는 일에까지 미쳐야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이 일편도 필경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시론일 수도 있다.

이 일편이 여러 선배의 질정을 받아 올바른 궤도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 원고를 엮음에 즈음하여 실측조사의 기회를 마련하여 주신 갈전량책 선생의 배려가 있었고 집필때에는 고 빈전박사, 갈전량책, 매원말치씨 공저의 “불국사와 석굴암”(조선보물고적도록 제1)과 갈도해치랑 박사의 “조선 건축사론”(건축잡지), 또 보산신삼씨의 석탑형태해석 등을 참고하였음을 명기하고 감사의 뜻을 표한다.

2. 석굴 조영계획의 고찰

이 일편에서 내가 시험코자 함은 석굴과 본존상, 또는 3층석탑의 조영계획에 대하여서이다. 석굴의 실측수치는 조선총독부에서 수리할 때 만든 공사도와 “조선고적도보” 5책에 실려있는 실측도를 참고하고 내가 실측조사한 것을 합쳐 작도한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본존상과 3층석탑은 내 자신의 실측에 따라 도면을 그렸다. 이상의 실측에서는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동척(銅尺)을 사용하였다.

구조물의 당초 계획을 살리는 일은 당시 쓰이던 척도를 찾는 일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현재의 실측치를 환산하는 작업과 주어진 수치에 따라 복원하여 가면서 옛모습을 찾아가는 방법이 가장 타당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석불사는 불국사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종래부터 이 시대에 당척(唐尺)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척은 보통 0.98곡척으로 환산한다. 즉, 0.98곡척이 당 1척이다. 이 환산치가 맞나 알아보기 위하여 석굴암에서 얻어진 실측치중 완척으로 보이는 것을 당척으로 환산하고 2, 3개소에 적응시켜 보았더니 대략 의도한 대로 일치함을 보았다.

예컨대,

석탑 제1층 탑신폭 = 1.96곡척
1.96곡척 / 2 = 0.98 …. (A)

석탑 상성기단 높이 = 1.96곡척
1.96곡척 / 2 = 0.98 ….. (B)

석탑기단신팔각1변장 = 1.97곡척
1.97곡척 / 2 = 0.985 ….. (C)

석굴평면원직경 = 23.6곡척
23.6곡척 / 0.98 = 24.072
23.6곡척 / 24 = 0.9833 ….. (D)

이상 (A), (B), (C), (D)의 평균치를 산출해보면 0.98207이라는 수를 얻는다. 전기한 표준 당척의 길이라는 0.98곡척과는 0.00207의 차이를 보인다.
석불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된 불국사의 조영척은 내가 정밀실측하여 얻은 바로는 0.9801245 곡척이었다. 석굴암에서 얻은 0.98207 곡척과 대차가 없음에서 석불사의 조영척도를 당척으로 보아 크게 어긋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하 각 장에서 당척이라고 하는 용어는 0.98곡척을 사용척도인 당 1척으로 환산한 촌법을 말하는 가명이다. 그리고 기법도중 괄호안에 표시한 수치는 현 곡척을 의미한다. 이는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당척을 환산하였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가. 석굴의 평면
석굴 평면의 각 부 현상 크기와 이것을 당척으로 환산한 촌법을 표로 만들어 보았다.

전실 개구(開口) – 13.158 전실 간구(間口) – 21.726 전실 깊이 – 11.628
굴개구 외부 – 11.373 굴개구 내부 – 11.251 굴개구 깊이 – 9.384
석주간격 – 8.568 굴내 횡직경 – 24.072 굴내 종직경 – 22.154

본존의 위치 – 굴의 횔직경선은 대좌지대석전면에 일치
이 표에서 보듯 굴원의 횡직경은 24.072당척이다. 당초 계획이 24.0당척의 완척으로 계획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래 굴의 평면 형태는 완원으로 계획되고 시공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지금엔 약간 이그러져 있다. 이는 처음 짜를 때 용재를 이음하면서, 또는 수리 때의 착오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석굴의 계획에서 본다면 처음부터 그것은 완원의 평면으로 구성되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겠다.
사실 굴입구의 간격을 12.0당척으로 설정하고 있음에도 완원으로 계획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즉, 12.0당척은 굴평면 원의 반경이며, 굴입구의 간격 12.0당척은 이 원에 내접하는 6각형의 한변에 해당된다. 또 본존대좌의 8각형 전변은 원평면의 횡직경선상에 일치한다. 이 전변의 중심점은 굴입구 간격 12.0당척이 이루는 선을 정3각형 밑변으로 하는 3각형의 꼭지점에 해당된다. 이는 또 원형평면의 원심이기도 한다.
이들을 조직적으로 관계를 검토하면 계획된 굴입구 간격은 12.0당척으로 설정되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다음에 전실을 본다. 전실 입구의 전단선상에 좌우로 연결하는 36.0당척을 상정하여 보자. 이것을 밑변으로 하는 정3각형을 구성하였을 때 그 꼭지점은 대좌 8각 전변 중심부에(2촌의 간격이 있으나) 일치함을 본다. 대좌 8각형 전변 중앙과 출입구의 간격을 긋는 밑변으로 구성되는 정3각형의 1변은 굴원의 반지름이므로, 이 반지름을 두배로 연장하면 24.0당척, 그 양쪽 끝을 연결하면 전실 입구의 선에 연결됨을 알게 된다. 이런 관계를 계획적인 기법이라고 해서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소개한 도면 전실부분에 3.0당척 간격의 방안을 그어보았다. 여기에서 그 평면형태를 살피게 된다.

나. 석굴의 입체

석굴의 입체구성에 대하여는 주로 굴단면에서 보이는 바를 고찰하는 편이 좋겠다. 굴을 이루는 각 부촌의 높이를 당척으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굴원반경 – 12.036
안상석 높이 – 2.960 벽판석 높이 – 8.976 이를 합하면 대략 12
이마돌 높이 – 1.48 감실 높이 – 3.77 이를 합하면 5.25
천개의 높이 – 29.172
감실이맛돌부터 천정까지의 높이 = 29.172 – ( 12 + 5.25 ) = 11.986
이는 대략 12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안상을 새긴 받침돌 아랫도리서 벽판석의 머리까지 또 감실 이맛돌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12.0당척에 가까운 수치를 갖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삽도 참조) 또 안상 새긴 받침돌 아랫도리에서 감실 이맛돌까지의 높이가 17.186당척이며, 그중 이맛돌(벽판석)과 감실과의 높이를 합치면 5.25당척으로 현상이 되어 있으나 원래의 계획은 5.0당척의 완척이었을 듯 한다. 감실의 천장, 이맛돌을 둥글게 만드는 과정에서 약 2.5촌의 차이가 나도록 변형되었었던 것이라고 하고, 감실 높이를 3.5당척으로 하여 벽판석 이맛돌 높이 1.5당척을 합하여 5.0당척이라 상정할 수 있다면 다음에서처럼 관계 기법의 조직적인 설명이 얻어지게 된다.
즉, 굴평면의 12.0당척을 굴벽면에 세워보면 벽판석과 이맛돌과의 이음에 닿는다.(차 0.064당척) 이어서 12.0당척이 구성하는 정방형에 대각선을 그으면 그 길이는 17.0당척이 되어 감실 이맛돌까지의 높이와 일치한다.(차 0.186당척) 또 굴의 궁융천장의 계획적 단면 형태는 감실 이맛돌로부터 천장까지의 높이가 12.0당척이며, 굴의 반지름과 일치한다. (현상과의 차이 0.014당척) 궁융의 단면형은 반원으로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들의 요소를 종합하여 석굴구성형태를 계획적 기법으로 요약한다면, 석굴 평면의 반지름으로 구성되는 정방형의 대각선 길이를 원주상에서 수직으로 잡고, 이 높이에 위치하는 평명원의 중심을 심으로 하여 위쪽으로 반지름을 이루도록 그어가면 반구형이 되고 그 선은 궁융천장의 구성형태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삽도중 설굴복원적 구성기법도를 참조)

다. 궁융부의 돌짷음 구조

굴의 궁융면은 감심 이맛돌 높이에서 24.0당척을 직경르로 하는 원둘레에 두고, 그 반지름이 되는 12.0당척으로 그어가는 반구형에 따라 천장돌이 구성되는 계획이었다고 보인다. 이는 부도의 현상도(석굴암 실측도 (2)와 (3))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현상이다. 이 구조를 자세히 말한다면 궁융의 돌째음은 원주대상에 연결되는 5층으로 이루어졌고 정부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천개를 의미하는 원반형의 거대한 돌을 얹어 막음한 것이다. 이 돌은 세쪽으로 갈라진 것을 수리하여 맞추었다.

원주대는 각 층이 석반 열개로 구성되는데 맨 아랫층의 돌은 크고 차츰 올라가면서 적은 돌을 사용하여 지름을 줄였다. 아래 2층을 제외하고 3층부터는 돌이 빠져 나오지 않도록 특수한 리벳-트형상의 돌로 의장적으로 가공하였다. 이 경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공작상 필연적이겠지만 각 석반의 이음새 선의 연장을 궁융 원심에 집중시킨 점이다.

이 구조에 대하여는 억설을 시험해 본다. 종래 조선총독부와 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하여 조사보고된 신라시대 고분은 대부분 석축구조이고, 그 평면 주체부가 주로 정4각형 또는 직4각형이며 이들 수직단면의 변체선은 위쪽으로 가면서 포물선을 그으며 좁아지고 정부에 개상거석을 올려놓아 마무리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석굴암의 천정과 대조하면 양자가 다분히 유사점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포물선적인 단면을 가졌다는 뜻은 그것이 4각형 평면이라는 점과 비교적 적은 석재로 궁율상으로 쌓아야 한다는 데서 기인한 결과이다. 정부(頂部)의 거석은 막음을 위함과 동시에 내려눌러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 놓이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석굴의 궁융부를 구성한 축조관념은 평면형태는 달라졌다손 치더라도 고분의 구축기법과 한가지 개념에서 쌓여졌던 것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다시 억측을 덧붙쳐 본다면, 이런 구축기법은 일반적인 신라 고분의 구축형태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의 석곽분에서도 볼 수 있고, 이는 낙랑, 대방의 전곽분 구축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석굴암에 이런 방식이 계승되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어쨌던 같은 구성법이 이 석굴에 응용되었고, 그 역학적인 기량의 우수성이 거의 극치에 이르게 하였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 기타 각부의 구조

석굴의 기초는 자연 지반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상당한 중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는 간단하다. 안상을 새긴 받침돌(계획된 높이는 3.0당척)을 굴내로부터 전실에 이르기까지 돌리고 그것을 자연석으로 평안히 바쳐 지탱하도록 의도하였다.
내벽은 받침돌 위에 여러 상을 양각한 판석(계획된 높이 9.0당척)을 이마추어 세워 구성하였고 그 이맛돌을 짜돌려 막음하였다. 굴입구의 통로(사천왕상앞의 통로)에는 2매의 타원형 아치-돌로 천장을 구성하였다.
전실의 이맛돌 위치에는 첨차모양의 돌을 앞으로 튀어나오도록 째았다. 그 뒷부리는 적심에 묻어 물고 있는 8부신중의 판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굴입구 좌우에는 8각형의 섶구(변경 약 1.95당척)가 연꽃무늬를 새긴 초석에 세워졌다. 기둥 중앙쯤에 또 연꽃무의 돌이 삽입되었다. 기둥 윗도리에 첨차를 두공처럼 짷아 궁융부와 연결되도록 하였다.

3. 본존석불의 구성에 대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석굴 자체에 조직적인 구성계획이 존재하였음에서 굴내에 모신 석불에도 이와 연관되는 구성계획이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는 실측한 수치를 기조로 하여 고찰한 결과 석불의 계획적 구성이 뚜렷한 것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도판 18. 참조)

가. 굴내에서의 위치
굴내에 모셔진 본존의 위치는 전장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설명하겠다. 굴평면 계획에서 24.0당척을 횡직경으로 하는 선이 대좌의 8각 전변과 일치함은 현상에서도 명확하게 파악된다.
굴입구 간격의 계획으로 보이는 12.0당척이 만드는 정3각형의 꼭지점은 석굴평면 원의 중심과 일치, 이것이 대좌 8각형 전변 중심과도 함께 만난다.

이와 같은 위치설정의 계획적 고증 중 주목되는 중요사항은 굴원반경과 같은 길이로 설정된 굴입구 간격 12.0당척이 만드는 정3각형의 중앙수직선의 길이 10.4당척의 2분의 1 즉 5.2당척이 대좌의 신부(竿石) 8각의 한변 길이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는 다음 절에서 설명할 대좌구성의 기준단위가 된다.

나. 대좌의 구성

대좌 각부분 형태설명은 도판 3과 18을 참조하기 바란다.
고찰에 앞서 주요 부분 실측 수치를 당척으로 환산하여 얻은 결과를 다음 표에 요약하고 번잡스러운 설명은 피하겠다.
당척으로 환산한 수치에 따라 고찰하면, 먼저 대좌 간석 8각의 폭 5.192당척은 5.2당척으로 계획되었던 것이며, 부도의 평면에서 볼 수 있듯이 기하학적인 기준단위가 되어 대좌구성을 하게 된다. 단 5.2당척은 지난 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관계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결정한 기본촌척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기대 중의 하대는 5.2당척이 만드는, 정8각형에 내접하는 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작도와 실측의 직경차이는 불과 3푼이었다. 상대의 상연에 해당하는 평면의 직경도 5.2당척의 2배로 실제와의 차이는 3푼정도, 복연부 직경은 실측이 9.01당척이라는 완척으로 계획되고, 간석 받침 직경은 7.36당척으로 5.2당척이 구성하는 정방형의 대각선 길이와 일치한다. 신부주체(竿石)의 8각형 평면 크기는 대좌구성의 단위가 되므로 그 실측한 수치는 정사고증하면 다음 표처럼 된다.
8각 일변 길이 – 2.152당척
대변과의 간격 – 5.192당척
그러므로, 일변의 길이가 만드는 대변폭 = 2.152 x 루트 2 + 2.152 = 5.1992
앙련좌부는 복연좌부와 대략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고, 부처님이 앉게 된 불좌의 직격은 9.43당척이다. 다소 깨어진 부분이 있으나 원래 9.5당척으로 계획되었던듯 하다. 이상에서 대좌의 평면적 구성을 보았다. 이에 대한 대좌의 높이는 5.5당척이며 이는 5.5당척으로 계획되었다고 보인다.
다. 불체 구성형태와 총고(總高)

지반에서 본존상까지의 총높이 실측치즌 16.7곡척, 이를 당척으로 환산하면 17.04당척이 된다. 석굴평면 원의 반지름 12.0당척이 만드는 정4각형 대각선 길이인 17.0당척과 4푼의 차이를 보인다. 굴내에 모신 주체인 본존이 석굴구조의 계획과 조직적으로 관계되어 있음을 알겠다. 당연한 일이다.

다음은 불체의 고찰. 풍만한 몸체의 본존을 실측하기 위하여 측점을 정하는 일은 매우 곤란하다. 다소의 오차는 자연히 생기게 된다. 내가 실측한 수치와 고찰한 결과 얻어진 관계 수치와를 합쳐 표를 만들어 보았다.

불체전고 – 11.53 안고(顔高) – 7.62 두장(頭長) – 3.88
슬장(膝長) – 8.79 견폭(肩幅) – 6.6
흉폭(胸幅) – 4.39 안폭(顔幅) – 2.22
먼저, 불체전고 11.53당척의 단수를 제한 11.0당척을 얻고 이것의 10분의 1인 1.1당척을 단위로 할 때 양 무릎의 간격은 8할, 이 8할선의 원형내에는 중앙 2할이 얼굴의 넓이, 4할은 가슴넓이, 6할은 어깨의 넓이를 활당하는 관계를 갖었다고 하겠다.
높이에서는 양무릎 간격을 한변으로 하는 정3각형을 작도하면 그 꼭지점이 얼굴의 턱에 닿는다. 즉 양무릎 간격이 이루는 정3각형의 중심 수선(垂線) 길이 7.62당척은 머리의 위치를 결정한다. 머리 크기(높이)는 전고에서 7.62당척을 뺀 3.91당척으로 이는 7.62당척의 2분의 1에 근사한 크기이다. 이런 관계는 석구내에서의 본존 위치의 계획기법과 대좌구성 규모와 전혀 동일한 방법임을 특기하여둘만 하다.
다시 양자의 관계기법을 구체적으로 요약하면,
1. 석굴입구 계획 크기가 만드는 정3각형의 꼭지점은 대좌의 위치를 접하고, 그 3각형의 수직선 길이의 2분의 1은 대좌 몸체의 폭을 결정함과 동시에 그 구성의 기본이 된다.

2. 부처님 양 무릎 폭의 길이가 만드는 정3각형의 꼭지점은 두부의 위치를 정하고, 그 3각형의 수직선 길이의 2분의 1은 머리의 높이와 근사하다.

4. 3층석탑 구성계획에 대하여
이 3층 석탑은 일반적인 신라시대에 비하여 석탑에 이례적이다. 이례적이라 함은 탑 기단이 원형이고 탑신이 8각형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있다. 현재 탑의 앙화(仰花) 부분 이상은 없어졌고, 복발(覆鉢) 이하는 완전히 남아있다. (도판 5. 참조)
고찰에 앞서 석탑 각 부분의 실측치와 당척으로 환산한 수치는 다음 표와 같다. 단 구성계획에 관계있는 실측치만을 간추렸다. 도판 19는 이들 실측치와 세부 실측치에 의하여 제도하였다. 구성계획의 관계를 여기에서도 배려하였다.

가. 평면구성
기단계획은 상층기단 몸체에 새긴 귀기둥 간격은 1당척이 만드는 정4각형의 대각선길이 14.14당척으로 계획되었다. 아래층 기단의 귀기둥 간격은 2.0당척이며 지대석은 2루트2당척을 한변으로 하는 정8각형에 내접하는 원으로써 평면을 계획하였다. 이들의 관계는 실측치와의 오차가 아주 미미함에서 한층더 뚜렷해진다.

제1층 탑신 평면의 길이는 2당척이 되는 정4각형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기단부의 계획에 대응시키기 위하여 탑신평면 정4각형 한변 길이의 2분의 1을 취하였다. 이들 세가지 수치들의 비교관계는 1 : 루트2 : 2 : 2루트2이다. 즉 정4각형의 한변과 대각선과의 관계에 의하여 창출된 것이다.(제1층 지붕 이상의 평면 계획은 다음 입면 고찰에 포함시킴)

나. 입면의 구성

입면구성은 평면을 기조로 하여 그 근간이 구성되었다. 즉, 기단평면의 원지름을 한변으로 하는 정3각형의 꼭지점은 제1층 탑신 상변 중앙에 일치한다. 이를 수치로 나타낸다면, 기단 원지름 6.832당척을 한변으로 하는 정3각형의 높이 5.92당척은 실측치 5.94당척과의 오차가 0.02당척에 불과하다. 그래서 정3각형 수선장(垂線長)을 하부에서 하층기단 높이 2.0당척과 상층기단 높이 2.0당척을 빼낸 나머지 길이. 그것이 제1층 탑신 높이로서 설정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탑신 높이 1.94당척과 탑신폭 2.0당척과의 차이가 불과 6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는 의장적 견지에서는 부적당한 것이므로 전기한 구성계획 존재가 인정된다. 탑신 입면 크기 설정은 정4각형, 또는 높이에 대한 몇할인가의 크기로 정하여진 폭, 그들에 의하여 형상되었으리니 필경 기단 원지름을 한변으로 잡는 정3각형 기법의 계획이 존재하였음을 수긍하게 된다.

상층기단과 제1층 지붕의 입면 구성
상층기단으로부터 제1층 지붕까지의 각 부재 높이를 합하면 4.94당척이 된다. 탑신 높이를 제외한 두 부분의 높이에는 완척을 사용, 1당척을 단위로 하여 그것을 5단으로 하여 총 높이를 얻었다고 보인다.
상층기단은 원과 8각과에 의하여 조성되어 있고 그 폭은 대체로 4단에 의하여 설정되었다. 이처럼 폭을 4로, 높이를 5로 본 비례는 불국사 3층석탑의 이 부분이 4 : 5 인 것과 일치하고 있다. 또 불국사 금당을 중심한 일곽의 지할과 천구리사지에서 볼 수 있는 가람일곽의 지할이 모두 4 :5의 비례를 갖고 있음과 대조될 만한다.

제1층 이상의 입면 구성
먼저 탑신폭을 보면 제1층은 2.0당척, 제2층은 상면평균 1.5당척, 제3층은 평균 1.1당척으로 이들의 관계는 아래층 탑신폭의 4분의 3의 크기로 위층 탑신의 폭을 결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3층 탑신폭과 노반폭(露般幅)을 관계시켰다. 따라서 이것의 기조는 제1층과 탑신폭이 기본이고, 그것은 다시 기단과 조직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이를 되풀이 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으므로 기단으로부터의 조직적 관계해석은 생략하겠다.
다음으로 제1층 총고와 제2층 모둠 높이와의 비는 대체로 전자를 2, 후자를 1로 잡았고 제2층과 제3층의 모둠 높이(총고), 또는 탑신높이는 제3층의 경우 제2층의 10분의 9에 해당하는 크기에 근사하다. 제2층 모둠높이 1.44당척은 곧 1.414당척에 가깝다.

각층 지붕폭, 즉 추녀마루끝을 연결하는 선은 일직선을 이루며 이것도 계획적인 관계에 따라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각층의 처마와, 처마가 구성하는 물매, 지붕받침 등에는 수치의 근사와 합치가 보이므로 시험삼아 그려본 도면에서처럼 정4각형을 여기에 그리면 그 대각선의 만나는 점은 처마와 받침과의 위치를 설정하여 줌을 알 수 있다. (노반과 복발의 형태.촌법는 도면에 표시되어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함)

다. 석탑조성계획의 중요사항

앞에서 말한 본 석탑 구성계획 중 중요한 사항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아래층 기단에서 제1층에 이르기까지의 각 부분은 주로 완척을 사용함.

2. 이런 구성은 1당척, 2당척과 이들이 만드는 정4각형의 대각선 길이를 기본으로 하여 조직적으로 구성하여 평면기하학적 기법을 써서 원과 8각형을 조성하였음.

3. 기단부 구성을 결과에서 본다면 제시한 도면과 같다. 아래층기단 몸체 8각에 내접하는 정4각형은 상층기단의 몸체 8각의 대각선을 1이라 할 때 그의 7분의 5는 위층 기단 몸체 8각의 대각선 길이가 된다.

4. 아래층 기단의 지대석 평면 원지름을 한변으로 하는 정3각형의 꼭지점은 제1층 탑신키를 결정, 그 3각형의 수선장에서 아래층, 위층 기단 높이 각 2.0당척을 제외한 길이가 제1층 탑신의 높이가 된다.

5. 위층 기단폭과 이 기단에서 제1층 지붕 끝까지의 1.0당척을 단위로 할 때 대체로 4와 5의 비를 갖는다.

6. 제1층 이상의 각층 구성은 기단부로부터 조직적인 구성분할을 설명할 수 있으나 제2층 이상은 완척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의장적 추량(推量)에 의하여 그 수치를 예의체감시켰다고 하겠다.

7. 각층 지붕의 옥개받침과 처마깊이와는 대략 정4각형을 작도하여 얻어지는 대각선의 교점에서 결정된다.

8. 각층 지붕의 귀퉁이, 즉 추녀마를 잇는 선은 일직선이 되도록 한 것이 계획적으로 고려되었던 듯하다.

5. 결론
이상 각 장을 통하여 살펴본 조영계획의 구성관계를 총괄하여 그의 기본기법을 찾아내면 다음과 같이 기초적인 평면기하학기법을 얻어낼 수 있다.

1. 완척을 기본단위로 삼았다.

2. 정4각형, 그 대각선을 사용하였다.

3. 정3각형과 수선(垂線)을 사용하였다.

4. 원형(타원형도)의 사용

5. 구면의 사용

6. 6각형, 8각형의 사용

7. 등할(等割)의 사용

이 같은 기초적 수법은 조영물 구성계획의 중추적 역할을 하도록 조직적 관계를 갖고 있음은 비단 석굴암에서 뿐만 아니라 불국사의 조영계획과 그 기법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여러가지 조영물이 이 기법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필경 그들 조영물의 창건 당초에 그런 법식에 따라 만들어졌다고하는 이외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정4각형과 그 대각선, 정3각형과 그 수선이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되었음은 이들이 갖는 선조(線條)의 비례와 형태, 도형의 성질상 무엇보다도 필연적인 일이었다고 하겠다.

또 석굴 부처님과 석탑이 한가지의 구성근간인 정3각형을 기본으로한 일은 형태의 안정감을 얻어내려는 수법으로 생각된다. 석굴의 구성과 석탑평면과 본존대좌 평면의 구성이 다함께 정4각형 한변을 기본을 하고 대각선을 전개하여 정8각형, 원형을 만드는 기법은 전체적인 비례구성상 극히 미묘한 계획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를 통하여 일정한 규거기준이라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그처럼 기본적인 기하학수법의 조직에 의하여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기하학적 기법을 조합하여 취사선택의 여하에 따라서 구성물의 구성미가 좌우된다면 이는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고 하겠다. 이미 석굴암 석굴, 본존상, 3층 석탑에서 그런 예를 본 셈이다.

이를 돌이켜 본다면 당시의 기술가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치밀한 조직적인 머리와 구성감각을 지니고 있었길래 그만큼 기법을 자유자래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그들의 예술적 기술의 풍부함과 그 깊이에 이제 겨우 맛을 들이게 되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는다.

석굴암
김익수 석굴암 원형에 관한 견해

ⓐ참배자의 정위치
대체로 모든 조형품은 그것을 바라봄에는 반드시 가장 알맞은 위치가 있을 것이다. 미술품에서 화화나 부조와 같이 한면의 감상물은 그 작품의 정면 중앙방향에서 알맞은 거리 –대개 작품의 시각선 길이의 3배정도–에 있고 조각과 같은 입체품은 정면과 측면, 때로는 윗면이 동시에 보이는 방향에서 알맞은 거리에 그 지점이 있다. 석굴암의 기본 구조에서 이 석굴암 내부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고정된 정위치를 필자가 밝힌 바로는 전실 중심에 있으되 그 정확한 관찰점은 바닥에서 160cm 높이에 해당되는 지점이다. 그 근거는 첫째, 본존불과 광배와의 관계. 둘째, 좌대 높이. 셋째, 광배의 상하직경과 좌우직경. 네째, 본존 크기와 관찰자와의 거리. 다섯째, 전실과 굴원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본존두상과 광배의 관계는 관찰자가 본존불에 접근하면 광배는 본존두상의 아래로 내려가고 관찰자가 본존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이 광배는 본존두상의 위로 올라 온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본존두상의 광배가 두광으로서 알맞게 놓이는 상태는 본존의 미간백호가 두광의 중심에 놓이는 때로서 이 때 두광의 중심과 본존미간백호를 잇는 직선상에 관찰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좌대 높이가 160cm라 함은 어떻게 하여 정해진 것인가? 석굴암 창건의 목적이 구원을 비는 기도도장이라고 볼 때 그 구원의 대상의 지존의 대상의 불상을 높이높이 모시고 싶었겠지만 지존의 대상 이기에 온 몸을 다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최대의 높이와 전신상을 볼 수 있는 좌대 높이의 극한점은 바로 관찰점의 눈 높이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존상의 좌대가 160cm라 함은 관찰자의 눈 높이로 보아야 하며 이는 곧 창건자의 눈 높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야나기의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혹은 멀리 가까이 여러 구릉을 바라 보면서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40리 남짓의 길은 여행하는 이에게 깊은 감흥을 일으킬 것이다.
마치 나라의 자연처럼 역사적 배경으로 에워싸인 고장은 사람의 마음에 저절로 시정(詩情)이 우러나게 하는 법이다. 멀리서 불국사의 기와를 나무 사이로 바라보며 사람들은 신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련하게 떨어져 있는 백운,청운 다리를 건너 자하문으로 들어갈 때 앞쪽으로는 대웅전을, 오른쪽으로는 기교를 다한 다보탑을, 왼쪽으로는 힘에 넘치는 무영탑을 쳐다보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여기서 되돌아가는 사람이 없다. 다보탑을 만져보고 우거진 수목 사이의 길을 뚫고 토함산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다. 올라감에 따라 길은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땀에 젖어 바위에 앉아 쉴 때, 이미 불국사의 지붕은 멀어져 마치 모형처럼 보인다. 다 올라가 산꼭대기에 이르면 광대한 화강암이 우리를 맞는다. 군데군데 사람이 가한 균열이 이끼 속에서 옛날을 이야기 하며 지금껏 남아 있다. 이것은 옛날 김대성이 불상을 만들기 위해 석재를 떠낸 흔적이다. 우리는 그 끌 소리를 지금도 듣는 듯하다. 흩어져 있는 돌들은 굴원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꼭대기를 돌아 왼쪽으로 돌아 왼쪽으로 꺽어서 비탈을 조금 내려가면 우리가 찾아가는 그 장소에 이르게 된다.

제작자는 놀랄 만한 주의력으로 석불사의 위치를 정한 듯하다. 어느 누구도 그 건축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관계에 미처 생각을 미치치 못했을 것이다.
굴은 동쪽으로 면하여 세워져 있다. 앞에는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누빈 듯한 산맥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다.
모든 것이 그 꼭대기에 의해 지배되고, 부처는 그 중앙에 편안히 자리잡은 채, 조용히 묵좌(默座)하고 있다. 아마도 한가위 무렵, 낮과 밤의 시간이 같아질 때, 동해를 뚫고 나오는 새벽빛은 굴원 깊숙이 들어와서 최초의 빛을 부처에게 보낼 것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우수한 작품과 자연을 접함과 동시에 그들을 선택한 옛사람의 마음과도 닿게 될 것이다.

모든 석불은 주도 면밀하게 배치된 듯하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 배치에서는 정연한 균제(symmetry)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먼저 굴원은 안팎의 둘로 나뉘고 두 개의 기둥이 그 사이에 엄숙하게 서 있다. 중앙에는 단지 석가만이 자리잡고 있다. 그에 비해 그 배후에는 십일면 관음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석벽의 가장 깊은 중앙에 서 있다.

하나는 엄숙한 남성의 아름다움, 또 하나는 조용한 여성의 아름다움이다.
그들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대립되면서도 중앙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광배는 부처 뒤에 있고 천개는 부처 위에 있다. 앞의 것은 복선 단판(複線 單瓣), 뒤의 것은 단선 복판(單線 複瓣)의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굴에 들어가는 양측에 각기 네 사람의 금강신이 마주서 있다. 다음에 오는 것은 좌우의 인왕이다. 오른쪽은 ‘불가월(不可越)’, 왼쪽은 ‘상향(相向)’. 하나는 입을 다물고 하나는 입을 벌린 아훔의 모습이다.

다음으로 비도에 있는 것이 사천왕이다. 짐작컨대 먼저 오른쪽 것이 ‘서방광목(西方廣目)’이고 이에 맞서는 것이 ‘남방증장(南方增長)’이며, 다음의 오른쪽 것이 ‘북방다문(北方多聞)’, 이에 맞서는 왼쪽 것은 ‘동방지국(東方持國)’ 이리라. 사천왕은 모두 칼을 들고 악귀를 발밑에 밟고 있다.

그리고 굴안에 들어가면, 먼저 좌우에 각각 두장, 도합 넉장의 석벽에 보살이 새겨져 있다. 구도를 보더라도 분명히 서로 쌍을 이루며, 오른쪽은 불자와 금강저를, 왼쪽은 불자(拂子)와 감로병을 가지고 함께 원대(圓臺) 위에 서 있고, 머리 뒤에는 타원륜(楕圓輪)이 똑같이 새겨져 있다.
4체가 모두 여인의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이와 대비를 이루며 이어지는 것이 좌우 각각 5체 도합 10체인 부처의 10대 제자이다. 남성의 깊이와 강함은 모두 이들 속에 집중되어 있다.

10대 제자란 첫째가 사리불(舍利佛)로서 지혜가 제일이다. 둘째가 목건련(木楗連)으로서 신통(神通)이 제일이다. 셋째가 마하 가섭으로 두타(頭陀)가 제일이고, 넷째는 아나율(阿那律)로서 천안(天眼)이 제일이고, 다섯째가 수보리(須菩裡)로서 해공(解空)이 제일이고, 여섯째가 부루나(富樓那)로서 설법이 제일이고, 일곱째는 가전연(迦剪延)으로 논의(論議)가 제일이며, 여덟째가 우바이(優婆離)로서 지율(持律)이 제일이고, 아홉째가 나후라(羅帿羅)로서 밀행(密行)이 제일이며, 열째가 아난다(阿難陀)로서 다문(多聞)이 제일이다.

구도로 볼 때 분명히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그밖에 위쪽의 작은 감실 속에 있는 좌우 10개의 좌상도 모두 정확한 대비에 의해 안치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없는 것도 있고 마완성인 것도 있는데, 아마 지금의 배치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실로 굴원은 분명히 하나의 마음에 의해 통일된 계획의 표현이다.

아잔타나 용문(龍門)과 같이 일정하게 계획된 통일을 가질 수 없는 역대 작품들의 집합이 아니다. 하나의 마음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연한 구성이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갈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유기적 작품이다. 외형적 으로나 심리적으로도 놀랄 만큼 주의를 기울린 완전한 통일체이다. (오늘날 굴 밖의 구조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잃은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이다)

실제로 각 부분을 따로 떼어내서 그 가치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 통일된 구조에서 석불사라는 하나의 조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굴 밖에 있는 것은 모두 수호신이다. 견고하기가 금강과 같은 그들의 마음은 지금 불토(佛土)를 지키기 위해 칼을 뽑아들고 나란히 서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범하고 불토를 더럽힐 수 없다. 인왕은 좌우에 서서 정말로 격노한 것 같은 위엄을 보이고 있다. 당장에라도 벽을 뛰쳐나와 우리에게 달려들 듯한 자세이다. ‘아,훔’의 상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불지(佛智)의 상징이다.

여기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면 이제는 칼을 거두고 악귀를 거느린 사방의 호세천(護世天)이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영원한 승리감과 사악에 대한 조소가 깃들여 있다. 그들은 동과 서와 남과 북을 제어하고 나서 바야흐로 뭇 사람들의 선악을 검사하여 부처에게 알리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심판없이는 굴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들 여러 수호신들은 모두 힘과 의지의 표현이다. 바깥 세계에 대한 제어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악에 대한 싸움이다. 세력과 위엄의 암시이다. 바른 것, 평화로운 것에 대한 영원한 가호이다. 종교에 대한 무한한 보증이다.

걸음을 굴 밖에서 굴 안으로 옮기면 마음 역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위대한 부처가 조용히 부동의 모습으로 연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우러러 보는 자는 그 얼굴 모습의 장엄하과 아름다움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곳은 완전한 영(靈)의 세계이다. 그는 앞에 네 사람의 여보살을, 뒤에는 십일면 관세음을, 좌우에는 사랑하는 열 사람의 제자를 거느리고 끝없는 영원의 영광을 알리는 것이다. 작은 감실의 여러 부처는 그 법열을 찬양하는 듯하다.

이곳은 외면적인 위력의 세계가 아닌, 내면적인 깊이의 세계, 아름다움과 평화의 시현(示現)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장엄과 그윽한 영기(靈氣)가 있다.
이 얼마나 선명한 대비가 굴의 안팎에 나타나 있는가. 여기에는 영(靈)의 역사가 있다. 모든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힘에서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동(動)보다 정(靜)에 사는 것이다. 종교의 의미는 이 굴원이 다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불사(佛寺)란 당우(堂宇)가 아닌 하나의 종교라야 한다.

여기서 종교와 예술을 나눌 수는 없다. 미와 진을 둘로 셀 수는 없다. 여기서 사람은 깨끗해지고 소생되어 일체의 샘인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만약 신라의 종교를 알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이 굴원에 와서 보아야 할 것이다.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는 여러 불상들은 모든 것을 풍부하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사람은 그들에게서 말없는 말을 들을 것이다.

이들의 정확한 통일은 반드시 한마음의 발현이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나는 확실히 김대성이 석불사의 제작자로서 충만한 신항과 감정을 지닌 인격체였다고 믿는다. 이러한 통일은 오직 위대한 종교심만이 낳을 수 있는 힘이다. 나는 어떤 석공이 그를 도와서 이 대업을 완성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중에는 숙련된 당나라의 석공도 또 신라의 석공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굴원 밖에서 안으로 들어감에 따라 그 기교와 내용이 점차로 발전해간 자취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연히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벽화가 이와 같은 경로를 보여주었음을 상기했다. 그가 제일 먼저 그린 노아의 여러 그림부터 마지막에 그린 천지창조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수법이 현저히 발전해나간 것이다. 그는 5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했지만, 석불사의 완성은 더 많은 햇수가 걸린 듯하다. (겨울에는 추위로 전혀 일을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긴 세월 동안 장공의 기능과 그가 추구하려 했던 종교적 표현도 점차로 그 깊이를 더해갔을 것이다.

나는 작품성으로 미루어보아 현존하는 불상의 위치와 거의 병행하여, 즉 제일 먼저 금강신을 만들고 다음에 사천왕을, 그 다음에 보살, 그리고 10대 제자 차례로 만들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기교 면에서 보아도 이것들을 꿰뚫고 있는 연관성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하다. 어떤 사람은 굴 밖의 여러 조상, 적어도 지금 있는 여덟 개의 금강신과 굴 안의 여러 불상은 전혀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는 한 이 점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각 수법상의 연결로 보아 모든 것이 한마음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또한 이렇게 보아야 비로소 굴원에 담겨 있는 통일된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마음의 자취를 알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굴의 안팎은 결코 마음이 연결되지 않은 별개의 작품이 아니다 나는 석불사를 하나의 통일된 예술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많은 작품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고 또한 추가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마음이 미묘하게 표현된 것이다.

굴 밖 양측에 늘어서 있는 금강신은 비바람 때문에 다소 마멸되어 음영이 약간 희미 하다. 새김질이 깊지 못한 부조(浮彫)로서는 적지 않은 손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전체적으로 굴 안의 여러 조상에 비해서 뒤떨어지는 작품인 것만은 사실이다. 거의 모두가 정면으로 우리를 대하고 섰으며, 자세는 직립이므로 자연히 움직임을 나타낸 것이 적고, 또한 조선 고유의 아름다움인 곡선을 많이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앞에서 직립하는 견고한 수위(守衛)를 보았지만, 금강신의 힘은 오히려 정지에서 나타나지 율동에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이 전형을 가장 바르게 나타낸 것은 입구 바로 우측의 것이다. 그러나 작품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좌측 인왕 옆의 것이다. 비로서 여기서 자세가 다소 자유로워지고 의복에 곡선의 아름다움이 일기 시작한다. 이것은 금강신 에서 사천왕의 기교로 옮아가는 가장 뚜렷한 연결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이에 인왕을 이야기 해야 한다. 이 좌우의 둘은 반라상이다.
오른쪽의 ‘불가월’은 그 규약에 따라 왼손을 펴서 머리 높이로 들고 오른손은 엄지를 세워서 앞에 놓고 있다.(지금은 불행히도 왼손은 끝이 완전히 없어졌다.)
왼쪽의 ‘상향’은 오른손을 틀어쥐고 높이 쳐들어 무엇을 때리는 자세를 하고 있다. 하는 지덕(智德)의 남성으로서 입을 다물고, 하는 이덕(理德)의 여성으로서 입을 열고 있다. 둘 다 불토를 지키는 과격한 형상을 하고 있다. 다른 금강신에 비해 힘이 넘치고 석벽에서 뛰쳐나와 달려들 듯한 형상이다.

그러나 수법과 표현에서는 아직 단순하고 질박해서 다음에 이어지는 사천왕 같은 복잡성은 지니지 못했다. 하지만 작품으로는 우수하다. 특히 내부의 여러 불상과의 관계에서 이 단순한 기교는 오히려 밖으로 나타나는 힘의 표시로서 현명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천왕은 어느 것이나 굴 밖에 있는 작품 중 걸작이다. 여기에는 수법도 이미 단순성을 떠나 복잡한 표현으로 옮아가고 있다. 특히 그 얼굴 모양에서 작자는 한층 더 진보를 보였다.
이들 넷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왼편의 안쪽 것이다. 제작자는 놀랄 만한 아름다움을 길게 이어지는 직선에 담았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순수한 조선의 예술을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악귀를 밟고 선 그 키 큰 모습에는 범상치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비웃는 듯한 그 얼굴이다. 허리에서 다리에 이르는 선이다. 그 오른손 형상이다.
그런데 이 사천왕에서 제작자가 보인 비범한 솜씨 중 또 하나는 발 밑에 밟힌 악귀이다. 이들의 괴기함은 실로 숨은 부분의 걸작이다. 우리는 이들 네 개에서 장공이 이루어낸 선의 아름다움과 추함의 아름다움의 출발을 본다. 이 두 가지 이상한 아름다움의 요소는 실로 굴 안의 여러 불상에서 그 극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부동함을 엄숙히 나타내는 두 개의 기둥을 지나 굴 안으로 발을 옮겨놓았을 때, 우리는 실로 놀랄 만한 예술작품에 둘러싸이게 된다. 석벽에는 다섯 여성과 열 사람의 불승(佛僧)이 새겨져 있다. 물론 이것은 미(美)의 따뜻함과 힘의 깊이를 날카롭게 대비시킨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네 사람의 보살이다.
선은 어깨에서 내려와 발로 흐른다. 엷은 비단을 통하여 부드럽게 드러나는 그녀의 살집, 그 가늘고 우아한 팔을 거쳐 저마다 모양이 다른 다섯 손가락, 눈썹도 눈도 코도 입도 모두 깨끗한 총명함과 아름다음의 표현이다.

부조의 얕은 새김질로써 어찌 이토록 교묘하게 입체의 공간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제작자는 특히 음영에 끊임없이 마음을 기울인 듯한다. 그는 석벽의 둥근 면을 이용하여 한쪽에서 주어지는 과도한 그늘을 다른 쪽 면으로 부드럽게 한 듯하다.
의복에 나타난 차분한 선들은 바깥 윤곽의 선명한 그늘 속을 누빈 듯이 흐른다. 이 빛과 그늘의 조화 속에서 보살의 모습은 떠오르는 듯이 우리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보다도 더욱 깊이 나의 가슴을 빼앗는 것은, 양측에 늘어서 있는 부처의 10대 제자이다. 나는 이처럼 내면의 깊이와 신비를 잘 나타낸 불교 예술을 본 적이 없다.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었던 제작자의 종교적 경험에 나는 한없는 외경을 금할 길이 없다.

이처럼 얼마되지 않는 선과 단일한 형태로 이만한 깊이의 복잡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 어디에 있을까.
열명의 제자는 모두 삭발한 중이다. 몸에 드리운 것은 한쪽 어깨에서 다른 쪽 팔 밑으로 드리운 소박한 한 장의 천이다. 이들은 커다란 머리, 쏘는 듯한 눈, 구부러진 높은 코, 긴 턱, 그리고 처진 귀를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로테스크인가.

그렇지만 여기에는 추함과 아름다움의 결합이 있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신비 그대로를 나타낸 것이다. 어떤 자는 속으로 격하여 기도를 한다. 어떤 자는 말 없는 가르침을 설교한다. 어떤 자는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거슬를 수 없는 율동과 움직일 수 없는 정적이 여기서는 둘이면서 결코 둘이 아니다.

고요의 깊이이자 힘이다.

더구나 이들 종교의 힘은 조선 고유의 아름다움음 통해 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또다시 그들의 모습을 아름다움으로 흘러들게 하는 것은, 그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길게 여운을 남기는 선의 내면적인 신비함이다. 그들이 바로 조선이 마음속에 그릴 수 있었던 부처의 10대 제자이다. 제자는 인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라에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나라는 망하고 역사는 변했지만 이들 조각에서 조선은 영원한 종교의 나라로 살아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앞에 멈춰 섰을 때, 오싹하는 전율을 느낄 것이다. 바야흐로 영(靈)의 이상한 순간이 바로 우리 앞에서 번뜩이고 지나가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굴원 깊숙이 관음상 앞에 다가서면, 사람들은 잠시 마음이 깨끗해지고 사랑의 세계에서 소생하게 된다. 제작자는 얼마나 주의깊게 사람의 마음에 대비하였던가. 엄숙하고도 깊고 육중한 열 개의 조각 가운데 한 여성이 조용히 서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자비로움을 그 얼굴에서 읽지 못하는 자가 어디 있으랴. 제작자는 이 조상을 새기면서 얼마나 깨끗한 기쁨을 느꼈을까. 비록 그 형식에서 새로운 요소는 찾아볼 수 없어도 이 작품은 영원한 마음의 증거이다.

이제 나머지 하나.
굴원의 중앙을 차지하는 부처의 좌상에 대해 이야기 할 차례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이 조각에 나타난 그의 뜻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할 수없다는 점에 바로 이 조상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복잡한 그 어떤 수법도 볼 수 없다. 그를 덮고 있는 옷의 선도 겨우 몇 줄밖에 안된다. 좌선하는 그는 가슴을 펴고 얼굴은 앞을 향했으며, 한손은 구부려 가슴 밑에 놓고 다른 손은 그냥 앞에 드리워 놓았을 뿐이다.
단지 이것이 제작자가 가한 외형이다. 그는 아무런 과장도 복잡함도 없다.

그러나 실은 아무 것도 없는 지순암, 그 속에서 제작자는 부처님의 지고함과 위엄을 정확히 포착했고 또 정확히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의미는 그 단정한 용모에 집중된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눈은 자는 듯하다. 그는 그윽하고 조용한 이 굴원 속에 앉아서 바로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침묵의 순간이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정려(靜慮)의 찰나이다. 일체를 품은 무(無)의 경지이다.

어떤 진실이, 어떤 아름다움이 이 찰나를 초월할 것인가. 그이 얼굴은 이상한 아름다움과 깊이로 빛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많은 부처의 좌상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신비로 요동치는 영원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이 좌상에서 조선에서 일찍이 맛볼 수 있었던 불교의 심대(深大)함을 믿는다. 이러한 작품에서는 종교도 예술도 하나이다. 사람은 아름다움에서 참을 맛보고, 참에서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다.

나머지 감실 속의 작은 불상들은 이 굴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제작자는 특별히 사랑을 쏟아 이들을 새긴 듯하다. 어떤 것은 정말 너무 아름다울 정도이다. 가련한 표정은 어느 누구의 마음이라도 녹여줄 것이다. 이 그윽한 굴 속에서 그들은 즐겁게 소리높여 정토의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긴 세월동안 30여 개의 대작을 새기고 나서 이들 작은 불상을 새겨 굴을 장식한다는 것은 제작자로서도 한없이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기쁨과 행복의 정이 이 작은 가슴에서 절로 넘치는 듯하다. 기교는 실로 극치를 달리고 있다. 단단한 돌도 여기서는 연꽃처럼 우아하고, 또 살결처럼 부드럽다.

석굴암
요네다의 석굴 측량

요네다 미요지는 1932년 일본대학 전문학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부터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촉탁으로, 성불사 개수공사,경주 사천왕사 천군동 석탑, 평양 청암리 사지, 부여 정림사지,불국사와 석굴암의 측량을 하게 되었다. 그는 현장경혐을 분석하여 다보탑의 비례관계.정림사지 오층 석탑의 의장 계획. 불국사의 조형계획. 조선 상대건축에 나타난 천문 사상등을 발표하였다. 요네다의 경주 석굴암의 조형계획의 논문은 석굴암 석굴의 과학적 신비를 푸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요네다는 조성 당시의 통일신라의 제작자가 사용했던 자는 지금의 곡척(30.3cm)이 아니라 당척(29.7cm)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불국사의 조영척은 0.980125곡척이였고 석굴사 석굴의 조영척은 0.98207 곡척으로 그 평균치로 쇠자를 만들어 측량하였다. 그 결과 석굴의 평면계획을 보면, 주실은 반지름 12자의 완전한 원이다.

지금의 석굴암 주실은 약간 일그러진 원의 형태이나 현존하는 주실 입구가 12자인 점과 그것이 주실의 원에 내접하는 육각형의 한 변에 해당하는 점에 미루어 보아 완전한 원이다.

주실의 대좌는 이 원의 중심에 놓인 것이 아니라 약간 뒤로 물러나 있는데, 대좌의 아랫부분 8각형 앞면은 주실을 이루는 원의 횡직경선상(橫直徑線上)에 일치하고, 이 8각형 앞면의 중심점은 주실 입구(12자)를 밑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그렸을 때 그 꼭지점에 해당하며, 동시에 주실을 이루는 원의 중심이다.

석굴의 입면계획에 대해서는,
석실의 벽면에 새겨진 조각상들의 받침돌 아랫변에서 조각상들의 윗부분에 이어진 벽판석의 윗변까지도 12자인데, 이는 주실의 반지름과 일치한다. 감실 높이는 12 x √2자이고, √2는 정사각의 대각선 길이이고, 감실의 천장에서 석굴천장에 이르는 길이는 12자를 반지름으로 하는 반원으로 이룬다.그리고 본존상과 대좌 높이의 합은 12 x √2자이다.

벽면 조각상 위 벽판석의 윗변에서 그 상단 감실의 높이를 더하면 이는 17.25자가 되는데, 이 수치는 가로를 벽면에서 주실 원의 중심까지로 하고, 세로를 벽면 아랫부분에서 벽판석 윗변까지로 한 정사각형의 대각선 길이다. 그리고 감실의 이맛돌로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는 다시 12자로서 굴의 반지름과 일치한다.

좌대는 정팔각형으로 간석이 끼여 있는데 간석 받침의 지름은 한변을 지름으로 하는 12자로 한 정삼각형 높이의 2분의 1인 5.2자를 기본으로 하여 5.2자의 정사각형이 이루는 대각선 길이가 되며 대좌의 아래쪽 받침은 5.2자가 만든 정사각형의 내접원과 일치한다.

이와 같은 수리관계로 요네다는 석굴의 구조가 12자를 기본으로 하는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 길이인 √2의응용, 원에 내접하는 육각형과 팔각형 등의 비례구성으로 이루어 졌음을 풀어 내었다.

이러한 요소를 종합하여 석굴형태를 계획적 기법으로 요약한다면, 석굴 평면의 반지름으로 구성되는 정방형의 대각선의 길이를 원주상에서 수직으로 잡고, 이 높이에 위치하는 평면원의 중심으로 하여 위쪽으로 반지름을 이루도록 그어가면 반구형이 되고 그 선은 궁융천장의 구성형태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석실의 천정에 해당하는 궁융면은 감실 이맛돌 높이에서 24자를 직경으로 하는 원둘레에 두고, 석판 열개로 구성되는 원주대로 맞추어져 있고, 석판의 이음새 선의 연장은 궁융 원심(圓心)에 집중되어 있다.

본존상은,
석실의 평면에서 본존상의 총 높이는 17자인데 이는 감실의 이맛돌 높이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앞서 본 바와 같이 석실을 구성하는 원의 반지름을 한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대각선 길이를 그 높이로 설정한 것이다.

그리고, 본존불의 얼굴너비는 2.2자, 가슴폭은 4.4자, 어깨폭은 6.6자, 결가부좌한 양무릎의 너비는 8.8자 이다. 양무릎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그리면 꼭지점이 턱에 닿는다.
즉 얼굴 : 가슴 : 어깨 : 무릎 = 1 : 2 : 3 : 4의 비율로 구성된 것이고, 이 부분의 기준이 된 1.1자란 본존불 자체의 총 높이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요네다는 자신이 측량한 수치를 근거로 쓴 “석굴암 석굴의 천체표현사고” 에서 다음과 같이 수리 관계를 풀었다.

석굴 구성의 기본은 반지름을 12자(지름 24자는 1일 24시간)로 원(360도는 1년) 이다. 석굴 출구의 12자는 1일(12刻)에 해당하고 궁륭천장(천체우주)은 같은 원둘레에 구축하여 유구한 세계를 표현하고 그 중심(천장덮개돌)에는 원형(태양)으로 연화덮개돌을 만들고 구면 각 판석 사이에 팔뚝돌이 비이져나와 별 자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석굴암
황수영 ‘석굴암 본존불의 존명’

지난 일제시대부터 일본학자에 의하여 석굴암 본존불의 존명이 석가여래라고 간단히 불려왔으나, 최근의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석굴 창건부터 서방정토의 아미타불이었다는 추정이 나오게 되었다.이와 같은 새로운 고찰의 요점만을 간단하게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석가여래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금세기초부터이며, 그 이전까지는 ‘아미타불’이라고 불러왔으며, 또 그같이 신앙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서, 1891년 신미년 석굴을 중수할 때 마련된 현판에는 ‘미타굴’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이보다 조금 앞서 만들어져 오늘 석굴암에 걸려있는 ‘수광전(壽光殿)’이란 편액(1882년 壬午)에서도 그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본래 석굴암 전실에 걸려 있다가 금세기초(1905년경) 그 전실이 붕괴됨에 따라 따로 밑으로 내려다가 그 당시 하나뿐인 이 건물에 걸었다고 짐작된다. ‘미타굴’ 또는 ‘수광전’이라 한 것은 모두 이곳 본존불이 아미타불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란 사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은 따로 무량수불, 무량광불이라고 부르므로 수(壽)와 광(光) 두 자를 따서 석굴법당의 이름을 수광전으로 삼은 것이 틀림없다.

둘째로, 본존의 양식이 보이는 우견편단(右肩遍袒)의 법의와 오른손의 항마촉지인 등 두가지 특색은 석굴암이 창건된 8세기에 신라의 아미타불에서는 가장 널리 보급되고 있던 양식이라는 사실을 들어야겠다.

오늘날 전래하는 경북 영주 태백산 부석사의 무량수전의 본존이나, 같은 경북 군위 팔공산의 삼존석굴의 본존좌상들이 석굴암 본존과 똑같은 수인의 좌상 양식을 갖고 있는 신라의 아미타불로서, 모두 석굴암 본존보다도 앞서서 조성된 사실을 들어야겠다. 따라서, 석굴암 본존은 신라석불좌상의 양식계보에서 먼저 아미타불로 고찰할 수가 있다.

그런데 처음 석굴암에 오른 일본학자가 수인(手印) 같은 점에서 속단하여 석가불로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라 당시의 중국, 특히 신라에서는 아미타불의 수인으로 수용되어 7세기부터 크게 유행한 양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 안의 고대불상에서는 이같은 수인의 불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점이 우리와 일본 석불과 목불 사이에 큰 차이이며, 동시에 신라불의 특색인 사실을 일본인들이 착각한 것도 이해할 수가 있다.

그후 일본학자가 다시 부석사 본존상의 양식과 수인이 석굴암과 똑같다고 하여 석가불로 판정한 것 역시 잘못이었다. 무량수전의 본존이기에 무량수불 곧 아미타불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신라는 그 자신의 특색을 지니고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판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같은 곳에서도 신라불교의 한 특색을 찾을 수 있다.

세째로, 석굴암과 신라 동해구 유적과의 관계를 들어야겠다. 일찌기, 삼국유사는 이 석굴암은 불구사와 달리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조성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봉안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1967년 5월에 이르러 동해에서 신라의 문무대왕 해중릉이 확인되어 국민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 이 사실은 석굴암을 건립한 경덕왕의 바로 선왕인 효성왕이 또한 동해에 산골된 기록과 더불어 더욱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덕왕이나 또는 석굴공사를 담당한 김대성은 모두 같은 김씨왕족의 핏줄관계에서 본다면 문무대왕이나 효서오앙은 모두 그들의 직계 선조 또는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동해에 장사한 두 임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석굴암이 그 장지인 동해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자리잡고 있는 엄연한 사실은 곧 석굴과 동해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사실을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실물로써 가르치고 있다.

고대의 위대한 작품은 비록 글자가 아니 전한다 하더라도 그가 지녔던 큰 뜻을 작품으로 하여금 오늘에 이야기하도록 그에 친숙해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노고의 대가로써 과분하게 보답받는 것이다.

끝으로 이 석굴의 본존불인 석불좌상을 아미타불이라고 추정함에 있어서, 그 시대의 배경으로서 신라 8세기 당시의 불교 신앙추세를 생각해볼 만하다. 이때의 믿음은 그에 앞서서 유행했던 미륵신앙을 누르고 아미타신앙이 압도하고 있었다. 신라의 극락정토를 염원하는 아미타신앙을 위하여 신라의 고승이었던 의상이나 원효 같은 고승들이 많은 역할을 담당한 사실도 들어야겠다. 신림,표훈 같은 고승들이 불국사와 석굴암이 완성되었을 때 초청되어서 이곳 초대 주지를 지낸 사실에도 주목해야겠다.

그 까닭은, 이들 두 고승은 모두 의상의 제자들로서 신라의 화엄종을 계승한 유명한 스님들이다. 앞에서 말한 태백산 부석는 바로 신라 화엄종의 중심사찰로서 의상이 7세기 후반에 창건했는데, 그 본존을 아미타불로 삼았다. 이 부석사 본존과 석굴암 본존은 모든 점에서 똑같고, 모두 아미타불로 봉안되어 온 사실을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불상양식의 계보는 그 배경에 신라불교의 믿음의 변천이 따르고 있으며, 한편 스님의 계보도 함께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대략 위의 몇가지 이유에서 이곳 본존의 명호는 봉안 당초부터 아미타불 곧 무량수불이었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쪽에서 들어와 반드시 서쪽을 향해 대불에 예불하고 있다. 상기한 부석사에서는 남에서 들어와 반드시 90도 몸을 서쪽으로 돌려 서쪽간에 봉안된 본존에 예배한다. 그러므로 동방불이 아니라 모두 서방불을 향하는 것이다.

황수영 선생님은 1918년 개성출생으로,
일본 동경대학을 졸업(1941년)
문학박사(1972년) 취득,
국립박물관 박물감,
국립중앙박물관장,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였고,
지금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재위원, 한국미술사학회 회원이다.
저서로는 “한국불상의 연구”, “한국의 불교미술”, “불교와 미술”, “불국사와 석굴암” 등이 있다.
황수영 선생님은 1963년도에 실시된 석굴암의 보수공사의 책임자를 지내셨다.

 

석굴암
최순우 ‘석굴암 본존상’

경주 토함산 중턱에 자리잡은 석굴암에서 앞을 바라보면 멀리 동해로 트인 양장구곡의 계곡을 따라 대종천이 흐르고 이 내가 바다로 이어지는 월성군 봉길리 어촌의 앞바다에 대왕암이라 일컫는 큰 암초가 솟아있다.
이 암초의 중앙에 넓이 네 칸 정도의 방형으로 파 내려간 인공 못이 있고 이 못 속에는 흡사 거북이나 전복 등어리 모양으로 만든 거대한 뚜껑을 덮은 신라 30대 문무대왕의 능이 맑고 푸른 물 속에 신비롭게 안치되어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성왕이며 항일정신이 투철하던 문무 대왕은 평화로운 신라를 항상 노략질하는 왜구를 저주한 나머지 ‘내가 죽으면 동해의 호국룡이 되어 왜적을 무찌르겠노라. 부디 나의 뼈를 동해바다에 장사지내 달라’는 뜻의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애국심의 화신 같은 위인이었다. 그분의 이러한 유언에 따라 온 세계에 그 예가 없는 신비로운 해중릉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문무대왕의 이 지극한 뜻을 받들어 이 문무대왕릉을 중심으 로 감은사, 석불사 같은 큰 절들을 세워서 호국룡으로 화한 문무대왕의 힘과 불법의 힘을 빌려 항상 바다로 침노해 오는 왜적들을 물리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석굴암은 바로 그러한 신라 사람들의 염원이 스며있는 국가적인 절이었으므로 이 절과 불상 조각에 나타난 신라 예술가들의 정성은 너무나 간절한 기도 같은 것이었다.

이 석굴암 중앙에 자리잡은 석가여래좌상의 숭엄한 눈길이 항상 멀리 동해 바다의 수평선 너머 먼 왜적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 수인(手印)은 촉지항마인(觸地降魔印)으로 적국을 항복시키려 한 신라인의 거족적인 소원이 여기에 뭉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자대비하며 원만한 위장부형의 얼굴은 신라인들이 이상하는 남성미의 꿈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며, 이 여래상을 둘러싸고 세워진 천이나 보살들의 아름다운 얼굴은 신라사람들의 정신력을 기둥으로 해서 신라의 조각 특히 이 석굴암 조각의 아름다움은 사색적인 한국인의 감각과 주위 환경에 알맞은 크기로 세계 어디에 내세워도 부끄럽지 않은 제일급의 작품을 낳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문무대왕의 위덕과 신라인들의 사색과 염원, 이것은 과거의 한국미를 창조해 준 자랑스러운 샘터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최순우
1916년 4월 27일 개성 출생, 본명 회순
1935년 송도고등보통학교 졸업
1943년 개성부립박물관 입사
1945년 서울 국립박물관으로 전근, 박물관 학예관, 미술과장 역임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
1981년 2월 23일 홍익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취득
1950년부터 서울대, 고려대, 홍익대, 이대 등에서 미술사 강의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역임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
주요 저서 : “최순우 전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강우방 ‘석굴암이란 무엇인가’ 

경주의 석굴암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흔히 알고 있기를 우리나라 불교미술품 가운데 가장 훌륭할 뿐 아니라 인도, 중국, 일본의 어느 유적보다도 아름답고 당당한 조각솜씨와 기발한 건축적 구조를 과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거니 알고 있을 뿐, 실제로 과연 그런지, 또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이 그러한지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전문가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일반사람들이랴.
……
우리는 한 교양인으로서 어떤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늘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자세히 관찰하여 여러 부분들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며, 의문이 있으면 기회 있을 때마다 물어서 대답을 얻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흔히 말하기를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홀연히 만유인력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번에 알아냈으므로 그를 천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의 진리란 그리 쉽게 파악되는 것은 아니며, 아마도 그는 오랫동안 늘 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여 왔을 것이다. 우주의 여러 현상에서 그러한 법칙을 이미 발견했지만, 확신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던 것이 어느날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대오(大悟)의 확신을 얻은 것 뿐이리라.

이처럼 우리는 늘 관찰하고 여러 의문을 가지고 알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어느 누구의 설명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게도 되며, 하나 하나 확인하여 가다가 확신에 이르게 되며, 그때 비로소 그 지식과 체험은 자신의 것이 되고 자신의 일부가 되며, 비로소 남에게도 설명을 할 수 있게 된다.

석굴암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석굴암에 대한 여러 의문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의문점은 자세히 관찰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생활인이면 모두 지녀야 할 태도이다. 또 석굴암에 대한 여러 글을 읽을 경우, 읽으면서 의문나는 점들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해보아야 한다. 그러한 탐구의 자세라든가 의욕이 없으면 어느 누가 아무리 훌륭한 설명을 해준다 하더라도 이해가 잘되지 않으며, 설령 지식으로 기억한다고 해도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고 곧 잊어버리고 만다.
……
이토록 세계적인 석굴암이라는 유적 자체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경덕왕대의 제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지었다는 것과 짓다가 천정의 돌이 깨진 것을 김대성이 낙심하여 잠던 사이 천신이 올려주고 사라졌다는 설화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있을 뿐이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났는지, 건축의 설계자는 누구이며 또 조각가는 누구인지, 또 이 석굴암에 어떤 불교사상과 신상이 나타나 있는지 한 줄의 기록도 없다.

이런 중에 최초로 석굴암의 조영의도를 밝히려 노력한 사람이 일본인 건축기사 요네다 미요지였다.
..요네다는 … 당척으로 중앙 본존의 높이는 1장 1척 5촌이며, 무릎폭은 8척 8촌, 어깨폭은 6척 6촌임을 계산해 냈으나 그 크기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밝히지는 못하였다.
고도의 신라수학을 응용하여 치밀하게 건축이 설계되었다면, 이 유적의 핵이라 할 본존의 크기도 무엇인가에 근거하였으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책을 섭렵한 끝에 드디어 그 수치의 근거를 유명한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찾아냈다. 앞에 든 석굴암의 본존의 크기, 어깨와 무릎폭은 현장이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디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가 당척으로 잰 그곳 불상 크기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불상의 자세는 석굴암의 것과 같은 항마촉지인이며, 또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크기, 자세, 방향이 모두 같은 것은 석굴암이 석가가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게 된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장소의 기념비적 유적을 재현하려고 했던 것임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
즉 석가의 생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도(成道)한 순간의 모습을 보드가야의 대각사에 모셔놓았는데, 신라인이 그것을 경주 토함산에 재현하려 했다는 사실을 이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아낸 나는 그날밤 너무도 흥분되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석굴암 본존의 치수를 외워두고 책을 보다가 혹시 발견되지 않을까 여러 달 찾았는데, 막상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아마도 그 당시 “대당서역기”가 널리 읽혀졌을 터이니 기본치수는 그 기록을 따랐을 것이며, 건축과 불상양식은 통일신라 최성기의 지혜로서 독창성을 마음껏 발휘한 것이리라.

그리고 이 석굴암에는 본존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 벽에 팔부중, 사천왕, 금강역사 등이 수호신과, 범천, 제석천 같은 인도 최고의 신들, 그리고 보살들과 10대 제자 등 무려 40체의 불상을 배치하여 이른바 판테온을 이룩하였다.
그 불상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솜씨로 조각하기 어려운 단단한 화강암에다 부드러운 생명감을 부여하였다.

비록 인도와 중국에 석굴암보다 더 큰 석굴들과 더 큰 상(像)들이 무수히 많지만, 이처럼 짜임새 있고 체계적이며 기하학적으로도 치밀하게 계획되어 흠 하나 없이 아름답게 조각된 불교유적은 다른 어느 나라에도 비교할 만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또 석가는 정각할 때 연기(緣起)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었으니, 부분과 부분, 그리고 부분과 전체의 조화로운 관계를 나타내는 연기의 법칙을 석굴암에서는 기하학적 비례로 구상화하였다. 결국 석굴암은 석가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성도의 자세를, 그리고 그때 깨달았던 정각의 내용을 건축과 조각으로 구상화한 위대한 유적이라 하겠다.

……

석굴암은 우리민족의 슬기와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누가 기독교미술이라 규정해 버릴 것인가. 작품에 나타난 주제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사상적, 신앙적, 조형적, 기술적인 형성과정을 추체험하려는 노력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석굴암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을 얻으려는 것보다 자주 보고, 자주 생각하며, 그 유적과 친해지려는 마음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강우방
1967년 서울대학교 독문과 졸업
이듬해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학사편입하여 한 학기 수료후 중퇴
일본 경도국립박물관 및 동경국립박물관에서 동양미술사 연수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주요 경력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 학예사, 학예연구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등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재직 중

주요 저서로는,

“원융과 조화”, “한국불교의 사리장엄”이 있고,
최근에 “미의 순례”라는 수필선집이 출판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지에 자신의 석굴암에 대한 오랫동안의 연구를 마무리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석굴암
남천우 크게 잘못된 오늘의 석굴

오늘의 석굴에는 잘못되어 있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석굴암’이라고 불리는 그 이름부터가 잘못된 것이고, 출입문을 들어서면 현재에는 전실이라고 부르는 소실이 있으나 그 이름도 사실은 근래에 생긴 것이며 원래의 그곳은 작은 마당이었다. 현재의 석굴은 완전히 밀폐구조로 되어 있으나 원래에는 완전히 개방구조 였으며 출입문은 개방되어 있었으며 그 위에는 광창이 있었으며 내부 주벽 상부에도 10개에 달하는 간접 광선과 통풍을 위한 창구가 있었다.
우리의 토함산 석굴은 인도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석굴사원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찰이며 산 속으로 파 들어간 이름 그대로의 석굴이 아니라 석굴모양으로 축조된 통상적인 석조건물인 것이다. 즉 주위의 벽은 40cm 내외의 비교적 얇은 석재로 짜여져 있으므로 그것을 보강하기 위한두터운 외벽이 또다시 있었다 하더라도 전체의 두께가 1m를 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래의 석굴은 통상적인 의미의 건물일 뿐 아니라 완전히 개방된 구조이므로습기가 많은 여름철에 있어서도 내부의 온도가 외부의 온도와 함께 상승하게 되어 통상적인 건물에서와 같이 습기문제는 없었으며 그렇기에 1200년 가까운 동안 잘 보전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있었던 두 번의 수리공사 때문에 석굴은 수난을 당하게 되었으니 현재 석굴에는 밀폐구조로 되어 있으며 배후에는 콘크리트를 시공하여 벽의 두께를 2m 정도가 되게 하였으며그것도 부족하여 그 위에는 또 다시 이중 돔을 만들어서 중간에 공간 층을 두어 석굴 전체를 덮어 놓았고 그 위에 또 다시 흙을 덮어 석굴은 13m 깊이에 묻혀 있는 땅굴 모양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여름철에는 석굴 굴 내의 온도는 항상 외부 온도보다 크게 낮으며 결로 현상으로 인하여 벽면에는 물이 심하게 내려 흘러, 부득이 2중 돔 공간에 강력한 냉각 창치를 설치하여 공기를 건조 시켜 굴 내에 보내고 있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현재에는 사람의 출입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게 이르렀다.

석굴의 구조와 구성 평면
구조
1708년 불국사사적기를 보면 ‘석불사를 지을 때에는 흙과 나무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삼베를 짜듯이 부처님의 돌집을 만들었다 (始創石佛寺 而不假土木 全以鍊石 織造石龕)라고 기록되어 있다. 축조방법에 있어 돌들을 실재로 베짜듯이 서로 경위되게 짜아 올렸다.
좌우의 돌들이 이어질 때에는 서로 버그러지지 않도록 양쪽 돌에 아령 모양의 홈을 절반씩 파서 鉛을 녹여 부었으며, 상하 로 돌을 축조할 때에도 돌들이 서로 물려 있도록 상하의 돌들에 홈 을 파놓고 있으며 이음새가 아래위로 서로 한 줄로 이어 지는 일이 없게 하였다.

반구형 천장을 만들 때에는 5단으로 나누어 만들되 경사가 적은 아래쪽 2단은 보통 판석모양으로 하였고 3단부터는 주먹을 쥔 팔뚝 모양의 돌들을 주먹을 안쪽으로 향하도록 각단에 10개씩 배치하였고 팔뚝과 팔뚝 사이에는 판석을 깔아서 양쪽 팔목에 꽉 물리도록 하였으며 마치 판석과 판석 사이에 밖으로부터 긴팔이 끼어 있어 안에서 주먹만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점차 수평을 향해서 경사를 더하여 가며 5단의 천정석을 짜 올린 다음 꼭대기의 마지막 원형의 마무리는 연화를 조각하였는데 그 돌에는 주위 전체에 턱이 파여 있으며 20개의 긴돌끝을 쐐기모양으로 그 턱에 받혀 떨어지지 않게 하고 있다. 천정의 구조는 이와 같이 밑의 돌이 빠져나가거나 또는 무너지지 않는다면 위의 돌이 먼져 빠져나가거나 무너질 수 없게 되어 있다.

석굴의 바닥은 큰 안반이며 그 의에는 큰 초석을 깔았고 그 위 지상의 제일 밑 부분은 3척 높이의 안상석이 둘러져 있고 그 위에는 9척 높이의 불상판석 ,그 위에는 1.5척 높이의 장갑석, 그 위에는 또다시 4.5척 높이의 감실이 있으며 그 위에는 반구형 천정이 있다.

전정의 현재 높이는 19.2척(약8.7m)이지만 그것은 약간 주저 앉은 높이일 것이므로 원래의 높이는 정확히 30척(8.91m)이었을 것이다.

석굴암의 창건
석굴암은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국왕의 뜻을 받들어 김대성이 주관하여조영하였다. 경덕왕은 신라 중대 최후의 임금으로, 번영한 때를 맞아 예술에 있어서도 신라의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는 석굴암과 불국사,다보탑,석가탑,불국사의 석교,황용사종, 분항사, 석가여래상을 비롯한 많은 불사를 이르켰다. 김대성은 김씨왕족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인 중시에 있었다. 삼국유사 향전에 의하면, 석불사(석굴암)는 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는 현생의부모을 위하여 세워졌다 한다. 석굴암이 위치한 토함산은 신라의 5악의 하나로 김씨 왕가일족의 산골처였다.

석굴암(石窟庵)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吐含山)산정 동쪽에 위치한 석굴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교구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암자이다. 국보 제 24호로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 석굴. 지난 96년에 세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의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직후로 추정되는 시기(1600년경)에 경영난을 겪게 되어 불국사에 예속된 암자로 운영되면서부터 그 이름도 바뀌었는데 원래의 이름을 계승하여 석불암이라 부르지 않고 색다른 이름인 석굴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기록에 보면 법당은 석굴이라 불렀고 승방은 석굴암이라 불렀는데 승방의 이름을 법당의 이름과 혼동하여 석굴암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들이었으며 1910년경부터이다. 석불사는 751년(경덕왕 15년)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불국사와 같이 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일반적이나 735년(성덕왕 34년)경에 불국사보다 일찍 창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 효선 제9(孝善第九)중의 신문왕대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條)의 내용에서 대성의 환생설화와 현세와 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를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시대적·사상적 배경
통일신라 사람들의 믿음과 슬기로 만들어진 석불사는 세계적으로 찬란한 건축 및 조형예술이다. 그러나 석불사는 건축기술과 미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 당시 국민들의 민족혼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석불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신앙의 소산이며, 국민 모두가 혼연일치 하여 이룩해 놓은 민족정신의 응결체이다.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이후 높은 종교적인 이념으로 일반 민중의 정신적인 지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도 원리가 되었다. 따라서 석불사의 창건은 단지 김대성의 개인적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거국적인 민족의 발원이 뒷받침되었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겠다. 우선 석불사가 토함산에 자리잡게 된 연유를 생각해 본다면 이 산은 신라 오악(五惡)중의 동악(東惡)으로 동방을 상징하는 용(龍)의 신앙과 결부되어 있는 영지(靈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특히 석탈해(昔脫解)가 동해로부터 상륙해서 토함산을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지략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가 통일된 후에는 석탈해가 토함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설화는 황당무계한 듯이 보여지나 그 속에서 신라 사람들의 조국을 지키려는 염원을 찾아볼 수 있다. 동악의 수호신이 된 석탈해와 동해의 호국대용(護國大龍)이 되었다고 전하는 문무대왕(文武大王)등 훌륭한 선왕(先王)들에 대한 숭앙(崇仰)의 충정은 석불사를 창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토함산의 정상(해발565m)부근에 터를 잡아 동해를 내려다 볼 수 있게 석불사를 세운 것이다.
석불사의 창건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성취한 다음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遺民)들을 무마하고 당나라와의 알력도 해소되어 정치와 문화 등 각 방면에서 가장 융성한 시기였다. 당시 통일 신라는 통일 초기의 정국(政局)수습 과정을 벗어나 안정과 내적인 충실을 얻은 시기였다. 그뿐 아니라 동양의 모든 나라들이 평화와 문화의 번영을 함께 누리던 시대였고 모든 나라들이 불교를 바탕으로 정신문화의 창달과 건축 및 예술에 눈부신 발전을 성취한 시대였다. 특히 통일 신라의 불교 문화는 국민 총화를 위한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대승불교 경전인 화엄경과 법화경의 교리가 바탕이 되었음으로 이 교리의 정신은 건축과 조형예술에도 그 영향을 주어 독특한 표현을 이루게 하였다.
당시 황룡사에서는 50만근에 달하는 거대한 범종(梵鐘)이 구조되었으며, 봉덕사의 유명한 에밀레종(무게12만근)이 만들어 졌다. 또한 그때 통일신라에서 만들어 보낸 예술작품인 만불산(萬佛山)을 당나라 황제 대종(代宗)이 보면서 “신라의 재간은 하늘의 솜씨이지, 사람의 기교가 아니다”(新羅之巧天造非人功也)라고 감탄했다는 기록과 이것을 보고 찬탄하여 만든 시에는「재주 있는 솜씨로 만불산을 새기니 하늘과 땅과 인간에게는 참된 교화(敎化)가 퍼지다.」라는 시구가 있어 그 당시 통일신라의 예술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는 불국사, 부석사, 해인사, 통도사, 화엄사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사(佛寺)가 창건, 또는 중창되던 시대였으며 불교문화의 융성을 바탕으로 학술·종교·예술·건축 활동이 찬란하게 펼쳐지던 시대였다.
석불사의 창건을 위한 대상(大相) 김대성의 발원은 신라 국민의 염원이었고 국민의 정성이 모임으로써 가능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융성했던 시대적인 배경과 사상적인 배경을 뒷받침으로 거국적인 노력과 정성의 응집으로 이와 같이 찬란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이루어진 것이다. 석불사의 건축은 통일신라 사람들의 창의와 전통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으며 수려하고 품위 있는 조각들 또한 그들의 높은 불교정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것은 승화된 생활 미학의 결정체이며 조국을 지키려는 민족정신의 발로이고 숭고한 불교 이념의 상징화라고 할 수 있다.

석불사의 역사
석불사의 석굴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그후 조선 중기 이후에 속하는 자료들뿐이다. <불국사 고금 창기>와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가 그 중 가장 중요한 기록에 속한다. <고금창기>는 1703년 (숙종29년)에 종열(從悅)이 중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수한 규모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또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중수한 사실과는 직접 관계가 없으나 기록할 당시의 석굴암의 현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어 석굴암의 역사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88년 5월 15일에 정시한이 이곳을 찾았을 때 석굴의 전실과 후실의 석상들이 완전한 형태로 건재할 뿐 아니라 입구의 홍예(虹 : 무지개 모양의 문), 본존상과 좌대석(座臺石), 주벽(周壁)의 여러 조각들, 천개석(天蓋石)들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때까지 석굴의 상태에 이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200∼300년전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되고 유지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김대성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중 대성효이세부모 신문대(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 에는 석굴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31대 신문왕이 즉위한 신사년은 당 고종 개요 원년이다.

나라에 효성이 지극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름은 김대성이라 한다. 모량리에 사는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가 그의 어머니이다. 그는 신문왕 즉위 2년인 임오년에 태어났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편하니 성(城)과 같았다. 그런 까닭에 대성(大城)이라 이름지었다.

본래 가난해서 복안(福安)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밭 몇 마지기를 얻어서 의식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 때 점개(漸開)라는 중이 있었다. 그는 육륜회(六輪會)를 흥륜사에서 베풀려고 보시(布施)를 받고자 복안의 집에 갔다가 베 50필을 얻었다.

중이 축원하여 말하기를 “시주하기를 좋아하면 늘 천신이 돌보아줄 것이며, 하나를 베풀어 그 만 배를 얻게 되니 수명 장수하고 안락을 누리게 될 것이오 (檀越好布施 天神常護持 施一得萬倍 安樂壽命長)”라고 했다

대성은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뛰어들어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제가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어보니 정말 그럴 듯 했습니다. 우리는 필경 전생에 좋은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 입니다. 지금을 보시를 하지 않고 또 무엇을 내세에 바라겠습니까. 제가 머슴살이를 해서 얻은 밭을 법회(法會)에 보시함으로써 뒷날의 영광을 도모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말에 어머니는 ‘그렇게 하자. 진실로 네 말이 옳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밭을 중에게 시주했다. 얼마 뒤 대성은 죽었다.(그 때 나이는 18세였다. 즉 모량리의 김대성은 신문왕 2년에 태어나 후에 기록된 바와 같이 효소왕 9년에 죽었다.)

대성이 죽던 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는 하늘에서 ‘모량리의 대성을 지금 네 집에 맡기노라’고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문량은 놀랍고도 괴이한 생각이 들어 사람을 시켜 이를 알아보았더니 과연 대성이 죽었다는 것이다. 죽은 날과 시간이 하늘에서 외치던 그 일시와 같았다.

즉 32대 효소왕 즉위 9년 경자년 2월 15일이다.

그날 문량의 아내는 임신하여 아기를 낳았는데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았다. 아기는 이레 만에 주먹을 폈는데 보니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어 그 연유를 따라 이름을 지었다.
대성은 그의 전생 어머니도 집에 맞아들여 함께 봉양했다. 그는 장성할수록 효행이 지극하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33대 성덕왕조에 총관(摠官)이 되었는데 공명정대함으로 일관했다.

34대 효성왕을 거쳐 경덕왕조에 이르러 높이 천거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補國崇祿大夫)가 되었다. 이때 나이 마흔아홉 살이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사냥을 하다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밑 마을에 내려와 묵었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나타나 ‘네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느냐, 내가 너를 잡아먹어야겠다’고 했다.
대성은 겁을 집어먹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귀신이 ‘나를 위해 절을 세워 주겠느냐?’고 했다. 대성은 승낙했다. 그리고 꿈을 깨니 땀이 흘러 자리가 흠뻑 젖어 있었다. 곧 그 곰을 잡았던 자리에 절을 세웠다. 그런 연유로 웅수사(熊壽寺)라 이름지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곰이 귀신으로 변하다니, 해괴한 일이 아니겠는가. 동악(東岳)의 신령이 선찰(禪刹)을 세워 불법을 일으키고자 변신하여 귀신이 되기 위해 죽었으리라. 또 대성으로 하여금 전생의 인연을 깨닫게 함으로써 악업을 짓지 않고 편히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대성이 어찌 죽은 곰의 말을 듣고 불법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먹었겠는가.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진실로 불법에 의지함으로써 가람의 신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였음이 틀림없다.
그로 인하여 비원(悲願)을 발하여 경덕왕 즉위 10년 신묘년,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건립하고 다보, 무영 두 탑을 만들어, 무영탑을 석가여래가 상주 설법(常住 說法)하는 보소(寶所)로 삼고 다른 하나인 다보탑을 다보 여래가 상주 증명하는 자리로 삼았다.

또한 청운(靑雲), 백운(白雲) 두 다리를 만들어 여러 부처와 보살들이 거니는 층계로 삼았고, 연화(蓮花), 칠보(七寶) 두 다리를 이어서 극락도사(極樂導師) 아미타불 보살이 오르내리는 층계로 삼았다. 그 밖에 사성(四聖), 사미(沙彌), 반야(般若), 육도(六道) 등의 열세 다리는 사성(四聖-聲聞,緣覺,菩薩,佛)과 육범(六凡-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이 설법을 듣기 위해 왕래하는 층계였다. 마치 옛날에 영산(靈山)에 모여서 묘법을 논하던 그 범절과 같고 또한 아홉 서열로 나누어진 서방 무량수국(無量數國)의 도량과 흡사하다.
……
이것이 이 절의 이름을 떨치게 한 대의가 아니겠는가. 이로써 세 번째 지은 것이 된다. 대성의 사람됨이 얼마나 위대한가. 옛날 석가불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석가불처럼 선근(善根)을 베풀고 오래오래 정업(淨業)을 이룩하고 그 후 500년 뒤, 남염부제(南閻浮提)에 태어나서 한 손으로 나라의 위급을 받들고, 한 손으로 불법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발원하여 나온 것이다. 이것은 여래가 사람을 보내어 불법을 중흥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
또한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였으되 토목을 쓰지 않고 전부 연석(鍊石)으로 석감(石龕)을 만들었다. 그리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뚜껑으로 삼았다. 그런데 갑자기 뚜껑이 세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놀라고 걱정하던 차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서 다시 맞추어 덮어주고 하늘로 돌아갔다.

천신이 외쳐 말하기를 ‘대신(大臣) 대성이여 걱정하지 말지어다. 하늘이 감동하여 내려와서 덮었느니라’라고 했다. 대성은 잠을 깨어 벌떡 일어나 남쪽 고개에 올라가 향나무를 지펴 천신께 공양했다. 그래서 그 봉우리를 이름하여 향령(香嶺)이라 했다. 그 굴안에 석불을 만들어 앉혔을 때 높이와 크기가 굴과 같았다.

돌로 파고 저미고 새겨 만든 이 두 절의 석상들은 찬연하기 이를 데 없는 장관이며, 동도(東都)에 여러 사찰이 있으나 장려함에서는 아직 이를 따르지 못한다.

이것이 어찌 대성 혼자의 힘이라 하겠는가.
천신과 국조(國朝)가 대성의 지성에 감동받아 하늘에서 내려와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 몸으로써 이승과 저승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도 자고로 듣기 어려운 일이다. 보시의 영검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이로써 믿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신림(神林), 표훈(表訓) 두 대사를 청하여 두 절의 주지로 삼아 마(魔)를 누르고 세상을 편하게 함으로써 군왕의 대조(大祚)를 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보답했다.

애석하도다. 하늘이 내린 바 수(壽)를 거스르지 못하고 36대 혜공대왕 즉위 10년 갑인(甲寅) 12월 2일에 대성은 죽었다. 즉 대력(大歷) 9년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공적은 천만 년을 두고 기려도 한이 없을 것이다. 이에 일월(日月)에 부쳐 이를 찬(撰)하는 바 이는 실로 억측이 아니라 옛 본보기를 따른 것이다. 뒷날 이를 보는 자가 가벼운 자기 의견으로써 동(東)을 일러 서(西)라 하지 말 것이며, 말을 가리켜 사슴이라 하여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보수연역 
제1차 공사(1913 — 1915년)
1913년 10월에 들어서서 착공된 공사는 초년도 작업으로서 먼저 붕괴의 위기에 놓인 석굴암 천정부에 대한 목제가구를 설치함으로서 그치었다. 그리하여 본존불과 그 위에 천정중심의 연화문연개석은 不動키로 하고 원개석을 중심으로 천정부를 돌아서 목판을 결구하고 그裏板상부에는 점토에 진사토 및 석회를 혼합충진하여 주위 굴착에 대비하는 동시에 입구에 철조강을 둘러 출입을 금하고 12월에 들어 작업을 중지하였다.

1914년은 공사의 중요 시기인 바 산의의 특수한 기상조건과 所要資料의 반입을 기다려 5월 21일에 이르러 기공하여 다음과 같은 내역의 진행을 보았다. 이하 현장감역을 전담하였던 飯島技手의 연도보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석굴암 해체부
6월15일로서 옥개석은 전부 해체하고 다시 외부 주위의 해체에 착수하였다. 기간 장소狹隘함과 해체석제가 의외로 많았기 때문에 작업이 뜻과 같이 진보되지 못하였으나 極力직공인부를 독려하여 8월7일에 이르러 겨우 계단불상 및 주위불상 전부의 해체를 완료함과 동시에 窟外(전실)불상의 撒去에 착수하였고 굴내불상 腰石외부의 굴착에 착수하여 8월17일로써 굴내외 석재전부를 撒出완료하였으며 石窟後背部의 巖石割除에 착수하여 9월12일에 전부 해체하였다. 그런데 당초에 예상하였던 판손석제이외에 외부에서 窺知할 수 없었던 파손석재가 다수임을 발견한 것은 本識이 特히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2. 석재살거체취운반 조각부
석굴해체와 전후하여 5월7일부터 우선 석굴보족석재 조각준비로서 이미 선정하였던 석재체취에 착수하여 7월15일에 이르러 최취석재 1,920切을 체취 하였으며 7월2일부터는 석재조각작업을 개시하여 차항기재하는바 가설공사 및 석재운반과 더불어 점차 진행되어 드디어 본 연도 중단기인 11월 20일 까지의 작업성적은 별지조각조서와 같이 진보시킴에 이르렀다. 특히 체취석재의 석질은 정선에 유의한 것과 善良石材의 天惠를 같고 있는 當山의 일이므로 製材의 견고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다소 다수의 勞役을 不免하였다.

3가설공사부
대개 溪間의 구릉지로서 완전한 도로가 없고 평탄지가 적어 석재운반과 작업이 곤란하였으므로 이같은 장해의 경감을 위해 상기공사 진보에 따라 所要의 가설공사를 실시하였으며 한편 잡공사로서 직공합숙 공사감독장창고 등을 가설하였다.

……….

1915년 5월에 석굴 재조립공사가 착수되었다. 석굴 재조립은 작년 말까지 완료된 기초 위에 굴 내외의 불상을 복원하는 것인데 불상을 제외한 석재에 있었어는 이미 전년도에 거의 治石이 완료한 신석재를 충당하였다. 석굴조립은 먼저 굴내주위의 要石列設置부터 시작하였고 周壁像에 이어 楣石 감실 天蓋石의 순서인 바 示方에 따라서 窟外 3尺을 두고 석재를 쌓아 堰板을 대신케 하고 석굴내벽석재와의 사이에 시멘트 1,모래3,잡석6의 비율로 積立했다. 이같은 시공은 석굴구축의 원형에 대한 가장 큰 변형사실인 바 창건 당초에 있었어는 석굴 外周에 (經 5척의 玉石 또는 切石으로써 2중으로 積立하여) 내벽석재를 두껍게 포장하였으며 석재 사이에는 아무런 접착제를 사용함이 없었다.

日政施工은 공사중도에 이르러 이같은 窟外周의의 원형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아무런 검토 또는 주의함이 없이 石窟解土 해체에 앞서서 이미 결정하였던 시멘트 콘크리트를 시공진행 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원상의 중대변형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이후에 있었어 석굴자체에 대하여 중대한 악작용을 주게되었던 것이다. 비단 석굴 뿐 아니라 동시에 시공된 분황사 석탑과 1915년시공의 익산 미륵사지 다층석탑이 그러하다. 이같은 콘크리트 돔이 頂部를 향하여 진행되는 한편 전실부의 시공도 뒤따랐으며 석굴입구좌우석단 및 돌계단공사도 진행되었는 바 그 기법과 석축방식에 있었어도 日式이 가미된 것은 약20여명 되는 석공 전부가 모두 日人이었다. 굴 입구 上面 및 전실좌우 양벽면 상부에 높은 石段築도 이 때 마련되었으며 전실입구부근에서 발견된 8부상 2軀를 다시 부가하되 좌우 벽과 굴곡시켜 인왕상과 마주보게 작업을 하였다.

제2차 공사(1917년)

1차 공사가 만 3년의 공기에 걸쳐 준공된 후 2년이 못되어서 굴 내에 漏水現象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 사태가 점차 현저해짐에 따라 1917년 7월에 그 방지를 위주한 소규모 공사가 工費 600원의 보조금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석굴암 住持名儀의 신청서에는 (굴 내의 漏水浸透로 말미암아 점차 내부의 불상을 汚損할 염려가 있어 이대로 두기가 어렵다)하였고 공사보조비지령안에 첨부된 회계장부 기록에는 이 같은 사태는 (設計不備에 기인된 것이라)하였고 (이후 이러한 사태가 발생치 않도록 엄중한 감독을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 鳥井雇員監督으로 이 누수방지 공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工種은 張芝 및 封土를 제거한 다음 콘크리트 돔 표면에 석회 몰탈과 粘上層을 마련하는 동시에 이 圓돔形의 외부에다 방사선상으로 배수로를 설치한 후 다시 성토 및 張芝하는 것이였다.

1917년 6월부터 7월까지 약 1개월에 걸쳐서 작업이 실시되었다. 이와 같이 1차 공사의 결함은 준공직후에 굴외 봉토층으로 부터의 누수로 나타나서 불상면을 따라 흐르게 되었고 이에 따로 불상의 오염이 주목케 되었는데 석굴 병폐는 이와 같이 日政工事의 시공에 따라서 그 준공 직후부터 발단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공사는 오직 굴 上部封土面에 대한 응급처치에 그쳤을 뿐이며 누수 및 오탁 원인에 대한 신중한 검토 없이 小額의 공사로 끝나고 말았다.

제3차 공사(1920 –1923)
1,2차 공사가 준공되었으나 공사에 대한 시비는 여전히 많았다. 그것은 주로 옛 경관을 파괴하고 日人토목기술의 방식에 따라 막중한 손상을 시켰다는 것인데 이것은 특히 미술부분의 人士로 부터 나왔다. 더욱이 석축 및 입구 홍예위에 놓은 석단축은 마치 기차 턴넬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2차 공사에서의 雨水방지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얼마 아니되어서 굴 내로 누수가 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굴내 最奧部 지면에 침수되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동시에 窟外周에 洋灰層을 만들어 굴내습기 過多를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으로 총독부는제3차 대규모 重修를 다음과 같이 실시되었다.

1,방수층설치
漏水處를 찾고저 봉토와 콘크리트 돔 외벽을 이루던 堰板代用의 석축층을 모두 제거하였는 바 콘크리트돔 천정부(콘크리트 이음부분) 에서 裂處 두군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1개소는 窟內向左 제1 龕室上面) 이곳으로 침수된 누수가 다시 확대된 것으로 판정되었다. 그러나 다른 주위의 벽에는 침수의 흔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장래에도 그같은 우려가 없을 것으로 보이여서 당초설계인 周圍部 콘크리트 층의 全面增設(덧바르기)을 변경하고 균열처만 따내어 보수 한 후 그 부분과 單形부분에도 콘크리트 증설의 필요가 생기고 다시 부근 요철면의 균 등을 기하고자 시멘트 30포를 필요케 되었다. 또 上記한 돔外面石恒 제거로서 요철이 많았으므로 몰탈塗는 당초설계의 厚平均 8分厚를 변경하고 원활을 기하고자 약2寸 내외의 몰탈층을 시공키로 하였다. 이 같은 돔 全面을 콘크리트 증가 또는 몰탈로서 고르게 한 다음에 방수용으로 아스팔트를 塗布하였으며 다시 이에 연속하여 碎石層을 신설한 다음에 흙을 덮고 잔디를 깔았다. 따라서 외부에서 봉토까지 침투하는 물은 돔面까지 이르기에 앞서서 이 쇄석층에서 여과되어 물이 떨어지게 되었으므로 그 최하부에는 돔에 직결 시켜서 U자형 콘크리트 배수로를 만들어 처리토록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쇄석층 또는 아스팔트 塗布面으로서 雨水를 유도 또는 제지하여 콘크리트 돔에는 물이 접촉되지 않도록 시공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보아서 3차 공사의 동기와 그 목적이 기설돔을 통한 漏水에 있음은 명백한 일이었다.

2.지하수 처리의 변천
제1차 공사에 앞서 후면에서 발견된 湧水 두군데는 석굴 밑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용수처를 중심으로 水槽를 짜서 鉛管으로 연결하여 窟外로 배수케 하였던 바 이 같은 방법은 확실히 用意不足하였으며 동시에 水量과 湧水狀況 및 석굴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현지에서 속결된 안이한 방식이었다. 이것이 곳 고장이 생겨 서 그같은 시설로서 상당량의 湧水가 처리되지 못함에 이른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그리하여 3차에 이 같은 鉛管導水方式이 폐기되었고 제1水槽부터 직접 돔 向右外周를 돌아 흐르도록 암석을 뚫고 석조 배수로를 신설하였다. 이 같은 방식 또한 석굴 지반과의 水位接近으로서 콘크리트. 돔과의 접촉과 漏水를 가져왔으며 土砂에 의한 배수로 充塞을 초래하고 말았다.

3.입구경관의 改變
1차 공사가 예술적 관점에서의 고찰 없이 이루어진 점은 이를 조사 설계한 일본인 기술자 두사람이 모두 토목기사 였음에서 짐작되는 바이며 關野博士의 의견서가 첨부되었다하나 현지조사가 이루어 지지 않은 전혀 형식적인 문서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3차 공사에 있었어는 첫째 虹아상면에 높이 솟았던 석축을 낮게 하였으며 입구좌우 석축에도 인공의 古態를 가하였고 또 扉道上面의 홍아 연석도 1개를 신설하여 舊態를 얻고자 하였다. 동시에 석굴 앞에는 2단 평행의 高低 석축을 쌓고 그곳에 지하수를 인도한 注口를 설치하는 동시에 봉토의 높이를 다시 낮추어서 주위의 자연경관과의 조화를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倭色과 최초의 변형에서 오는 몰취미한 결구방식은 그 근본적 시정을 얻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3차 공사가 완료되었으나 1차 공사 시공과 같이 전실옥개부에 대한 配案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1차 공사에 앞서서 上擧한 國枝技師의 復命書에는 前室架構案이 보이었으나 실시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석굴이 직접외부에 노출됨으로서 굴 내 환기의 이점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로 말미암은 외부 자연조건에의 暴雪 및 土砂나 靑苔要因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석굴 중심으로 하는 특이한 氣象조건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방비책이나 배려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대로 그 것이 견고한 화강석이라는 특질에의 막연한 존재만이 그대로 계속되어 왔었다. 이 3차공사시에도 1차에 이어서 總督府技手 飯島源之助氏가 감독을 담당하였으며 중앙에서는 巖井技師가 지도하였다. 이 공사소요경비는 3차에 나누어 16,985원이 지급되었다.

불상의 기원
우리는 불교 관계 모든 일반상에 대하여 막연히 불상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처의 존상에 한정 되는 명칭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아닌 보살이나 제천 명왕 불제자상 등을 불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불교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
불교상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제천상이며 범천, 제석천, 길상천 등은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고대 인 도 조각 가운데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들은 불교상으로 존제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상에서 본다면 불상이 가장 먼저 만들어지고 다음에 보살상들이 만들어졌으며 제천상을 비롯한 다른 불교상은 훨씬 이후에 만들어 졌던 것이다.

불상 가운데서는 물론 석가상이 가장 먼저 만들어 졌다. 최초의 불상은 나무로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가장 일찍 편찬되었다고 하는 ‘아함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의 전설적인 서술에 의하면 코삼비국의 우다야나왕이 향나무로 석가의 모습을 조각하도록 했다는 것이 불상조각의 시초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로서 전하는 이야기일 뿐 사실로 받아드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석가의 유적지로서 가장 오래된 붓다가야의 조각에도 그 다음 시기의 바르하트탑, 산치탑 등의 조각에서도 불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탑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석가가 표현되어야 할 곳에 불좌, 보리수, 불족적, 보륜 등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중인도의 바르하트, 산치 또는 남인 도의 아마라바티 같은 인도 초기의 불교 미술인 BC 1세기 무렵 의 대탑에는 부처의 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
이들 탑의 양식은 복발형으로 상부에는 평두를 놓고 다시 그 중앙에는 상륜을 꽂았으며 그리고 탑을 돌아서 난간이 있고 사방에 탑문을 세웠는데 주로 이 난간과 탑문에 석가 생애의 중요한 장면이라든가 본생담을 주제로 한 조각이 있다. 그런데 이 조각의 주인공인 석가를 표현하지 않았고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석가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원칙은 바르하트로부터 산치, 아마라바티 조각에 이르기 까지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 실제로 불상이 출현하게 되는 것은 훨씬 이후가 되는 석가 입멸 후 500(기원 전후)무렵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도 불교도 들이 500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왜 불상을 만들지 않았는가이며 또 500년이 지나고 나서는 어떤 이유로 불상을 만들게 되었는가이다. 대개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은 부처의 신성에 대한 모독이 된다 는 이유에서였다.

부처는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보통사람과는 다르 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불상을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최초의 불상 제작을 제천의 공장인 비수갈마천 (제석천을 수종 하는 천신으로 여러 가지 공교물을 만든다. 또 건축을 주관하는 천신이다.) 의 공으로 돌리고 있는 사실을 미루어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입장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가 공인 종교가 될 때까지 조형 예술의 작품을 예배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카타콤에서도 엄격한 규제 아래 겨우 허용하는 정도 였다.그것도 초상화는 엄금되고 다만 상징적인 그림만을 허용했는데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경우 새끼 양이나 비둘기, 물고기, 포도나무, 조합문자 등으로 표현했던 것은 물신적인 대상이 아닌 그 정신에 입각한 신앙의 입장을 고수 하려는 데 근본 뜻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고대 교회 및 교부들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래서 3세기까지도 예수를 조형예술로 표현하는 것은 성서에 위반이고 우상숭배라고 주장하였다. 예수를 그린 작품은 4세기 이르러서도 거의 드물었고 그 표현은 5세기에 들어 기독교의 세력 이 신장되면서 가능해졌던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석가는 붓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이후 대부분 생애를 대중 앞에서 설법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소분의(시체에 입혀졌던 옷을 기워서 만든 가사) 를 걸치고 나무 밑 암석 위에 거쳐 하며 탁발의 생활을 했다.

불교도가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며 경건하게 참배하는 석가의 ‘법화경’ 설법 장소인 인도 영취산은 당시에 시체를 가져다버리는 장소였다. 영취산은 고대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서 십 리 남짓한 거리에 있는 거친 바위산이다. 이곳에서 석가는 시신에게 입혔던 옷으로 기운 가사를 걸치고 제자들과 함께 머물었다.
이와 같이 석가의 생전의 모습을 본다면 그가 입멸에 든 후 불상을 만들어 예배 공양한다는 행위는 석가의 근본 정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도리어 그의 정신과는 먼 것이었다. 석가의 가르침과 집접 만났던 당시의 불제자나 불교도들은 다만 석가의 정신을 사모하고 따랐던 것이다.

우리는 불교 관계 모든 일반상에 대하여 막연히 불상(佛像)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상은 부처의 존상(尊像)에 한정되는 명칭이다. 그 러므로 부처가 아닌 보살이나 제천(諸天), 명왕(明王), 불제자(佛弟子)상 등을 불 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불교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
불교상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제천상(諸天像)이며 범천(梵天), 제석 천(帝釋天), 길상천(吉祥天)등은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고대 인도 조각 가운데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들은 불교상으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상에서 본다면 불상이 가장 먼저 만들어지고 다음에 보살상이 만들어졌으 며 제천상을 비롯한 다른 불교상은 휠씬 이후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불상 가운데서는 물론 석가상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최초의 불상은 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가장 일찍 편찬되었다고 하는『아함경(阿含經)』을 비롯한 여러 경전의 전설적인 서술에 의하면 코삼비(Kaus mb )국의 우다야나왕이 향나 무로 석가의 모습을 조각하도록 했다는 것이 불상조각의 시초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로서 전하는 이야기일 뿐 사실로 받아들일 수 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석가의 유적지로서 가장 오래된 붓다가야 (Buddlhagay , 成道의 땅)의 조각에도 그 다음 시기의 바르하트(Bh rhut)탑, 산 치(Sanch )탑, 등의 조각에서도 불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탑에서 우리 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석가가 표현되어야 할 곳에 불좌(佛座), 보리수(菩提樹), 불족적(佛足跡), 보륜(寶輪)등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중인도의 바르하트, 산치 또는 남인도의 아마라바티(Amaravat ) 같은 인도 초기의 불교 미술인 BC 1세기 무렵의 대탑(大塔)에는 부처의 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 이들 탑의 양식은 복발형(復鉢形)으로 상부에는 평두(平頭)를 놓고 다시 그 중앙에는 상륜(相輪)을 꽂았으며 그리고 탑을 돌아서 난간이 있고 사방에 탑문(塔門)을 세웠는데 주로 이 난간과 탑문에 석가 생애의 중요한 장면 이라든가 본생담(本生談, J taka)을 주제로 한 조각이 있다.
그런데 이 조각에 주인공인 석가를 표현하지 않았고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석가의 모습을 대신하 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원칙은 바르하트로부터 산치, 아마라바티 조각에 이르 기까지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
실제로 불상이 출현하게 되는 것은 휠씬 이후가 되는 대개 석가 입멸 후 500 년(기원 전후)무렵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도 불교도들이 500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왜 불상을 만들지 않았는가이며 또 500년이 지나고 나서는 어떤 이유로 불상을 만들게 되었는가이다.
대개 불상 을 만들지 않았던 것은 부처의 신성(神性)에 대한 모독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부처는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보통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데 감히 불상을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최초의 불상 제작 을 제천(諸天)의 공장(工匠)인 비수갈마천(毗首鞨磨天, Visvakman)의 공으로 돌 리고 있는 사실을 미루어보더라도 짐작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입장은 기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가 공인 종교가 될 때까 지 조형 예술의 작품을 예배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카타콤에서도 엄 격한 규제 아래 겨우 허용하는 정도였다. 그것도 초상화는 엄금되고 다만 상징 적인 그림만을 허용했는데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경우 새끼양이나 비둘기, 물고기, 포도나무, 조합문자 등으로 표현했던 것은 물신적인 대상이 아 닌 그 정신에 입각한 신앙의 입장을 고수하려는 데 근본 뜻이 있었다.
바로 이 것이 고대 교회 및 교부들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래서 3세기까지도 예수를 조형 조형 예술로 표현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위반이고 우상숭배라고 주장하였다. 예 수를 그린 작품은 4세기에 이르러서도 거의 드물었고 그 표현은 5세기에 들어 기독교의 세력이 신장되면서 가능해졌던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석가는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이후 대부분의 생애를 대중 앞에서 설법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소분의(掃糞衣)를 걸치고 나무 밑 암 석 위에 거처하며 탁박(托鉢)의 생활을 했다.
불교도가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며 경건하게 참배하는 석가의『법화경』설법 장소인 인도 영취산(靈鷲山, Grdharakuta)은 당시에 시체를 가져다버리는 장소였다. 영취산은 고대 인도 마 가다국(Magadha)의 수도 왕사성(王舍城)에서 십 리 남짓한 거리에 있는 거친 바위산이다. 이곳에서 석가는 시신에게 입혔던 옷으로 기운 가사를 걸치고 제자 들과 함께 머물렀다.
이와 같은 석가 생전의 모습을 본다면 그가 입멸에 든 후 불상을 만들어 예 배 공양한다는 행위는 석가의 근본정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도리어 그의 정신과는 먼 것이었다. 석가의 가르침과 직접 만났던 당시의 불제자나 불 교도들은 다만 석가의 정신을 사모하고 따랐던 것이다.

도선(道宣, 596 667)의『속고승전(續高僧傳)』에서 볼 수 있는 초기 중국 선 종사(禪宗史)의 두타(dhuta, 頭陀)행자들의 용감하고 장부다운 맹렬한 고행과 구 도정신은 이러한 석가의 근본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지엄(智儼)은 좋은 가 문에 태어나 영화로운 무인(武人)의 길을 버리고 사십 세가 넘어 능가종(稜伽宗)의 중이 된다. 그는 나병환자들의 곁을 지키며 그들의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 을 입으로 빨아 내고 옷을 빨아주며 만년을 바친다.
혜가(惠可)와 승나(僧那), 혜만(慧滿)등 능가종의 초기 승려들은 모두가 두타계행(頭陀戒行)의 용맹스러운 실천자들이었다. 혜만의 경우 그가 죽은 후에 남긴 것이라고는 몸에 걸치는 누 더기를 기우기 위한 바늘 두개가 전부였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있었다 면 그것은 안일한 삶이었다. 이처럼 불교 근본주의의 철저한 입장에 초기 선종 승려들의 말과 행위, 삶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연전에 성철 스님이 입적(入寂)한 후 사리가 많이 나와 화제가 되었고 유품으 로 기운 가사 한 벌과 석장 하나를 남겼던 사실이 불교도들에게 감동적인 기억 으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일련의 입장은 불교의 근본주의에 그 자취가 있는 것 이다. 성철 스님의 사후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조상을 만들고 수식하고 부연한 다는 것은 본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석가의 입멸 후 오랫동안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도 있다. 불교 미술사상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ㄸ를 일컬 어 무불상시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무불상시대에 인도 불교도들이 부처를 기 억하고 예배했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그 첫째 예배대상은 부처의 몸을 다비(茶毗)해서 얻은 사리(舍利, ar ra)였으 며 이 사리를 모시기 위한 탑은 일찍부터 만들어졌다. 바로 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예배했던 인도에서의 탑이 우리나라에서 불교 전래 이후 전시기를 통해 많이 조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석탑(石塔)의 연원이 된다.
다음으로 예배대상이었던 것은 금강보좌(金剛寶座)와 보리수(菩提樹) 그리고 보륜(寶輪)과 불족적(佛足跡)등이 있다. 이러한 상징적인 표현은 불교 이전부터 있어왔다. 불교 이전의 고전적이고 성스러운 표상들로서 이 표상들이 불교 도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금강보좌는 석가가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앉았던 자리(台座)이다. 당나라 현 장의『대당서역기』에 보면 “보리수에 에워싸인 한가운데 금강보좌가 있는데 아득한 옛날부터 천불(千佛)이 여기 앉아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금강좌라 한 다”고 서술했다. 금강좌란 금강(金剛)처럼 귀하고 견고한 자리라는 뜻이다. 한편 이 금강보좌를 사자좌(獅子座)라고도 부른다.
백수의 왕이며 용맹한 짐승이 사 자이기 때문에 부처를 사자로 비유하고 부처가 앉은 자리를 사자좌라고 불렀던 것이다. 초기 불상의 대좌에는 실제로 사자가 표현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불상 에도 좌대에 사자가 표현된 예들이 있다.『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월성 동쪽 신궁의 남쪽에는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고 그곳은 곧 전불시대 (前佛時代)의 절터이며 한번 보았는데 돌의 높이가 5, 6자나 되고 그 둘레는 세 발 정도이며 우뚝 섰는데 위는 편편했다.”라는 서술이 있다. 이 가섭불의 연좌 석인즉 금강좌인 것이다.

보리수는 원래 비파라수(卑波羅樹)인데 그 나무 아래서 석가가 보리(菩提)를 성취했다 하여 보리수로 불리게 된 것이다. 비파라수는 인도에서 이미 5천여 년 전부터 신성시되던 나무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 아래서는 거짓말하기를 두 려워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古代)에 신단수(神壇樹)를 천신(天神) 강하의 신 성한 장소로 여겼던 성수(聖樹) 숭배의 기원이 있다.
현장의『대당서역기』에 의하면 금강좌 위의 보리수는 핍팔라(畢鉢羅)나무인데 옛날 부처의 재세(在世) 시에는 높이가 수백 척이었고 가끔 벌채했음에도 아직 높이는 4∼5장(丈)이 된 다고 적고 있고 부처님이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보리수라 부른다 고 하여 줄기는 황백색이고 가지와 잎은 푸른데 겨울이나 여름이나 잎이 지는 법이 없고 윤이 난다.
그러나 해마다 여래(如來)의 열반일(涅槃日)이 되면 잎이 모두 떨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무성해진다고 한다. 그날이 되면 여러 나라의 군왕, 승려, 속인 등 수천만 명이 모여들어 향수와 향유를 붓고 음악을 연주하 고 향화를 바치고 등불을 켜서 밤낮없이 공양한다는 당시의 소식을 적고 있어 우리는 보리수를 통해 석가를 기억하고 예배 공양했던 사실을 또한 알 수 있다.
보륜(寶輪) 또는 법륜(法輪)은 부처 설법의 표지이다. 불법(佛法)의 바퀴를 돌 린다는 의미이다. 보륜은 본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칠보(七寶)가운데 하나였던 것인데 불교 설법(說法)의 상징 표시가 된것이다. 보륜상(寶輪相)은 부처의 32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흔히 불상의 손바닥과 발다닥에 표현되기도 한다. 우 리나라 고려 불과(高麗佛畵)불상의 손바닥과 발바닥에는 어김없이 보륜이 금니 (金泥)로 그려넣어졌다.
불족적(佛足跡)은 바라문교의 주신(主神) 비슈누(Visnu, 毗紐)의 족적(足跡)예 배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현장의『대당서역기』에는 인도 불족적 유적에 대한 내용이 여러 군데 나온다.
아쇼카왕 탑으로부터 멀지 않은 정사(精舍)에 큰 돌이 있다. 여래가 밟은 곳 으로 두 발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길이는 1자 8치 남짓, 너비는 6치 남짓 된다. 양쪽 발자국에는 모두 윤상(輪相)이 있고 10개의 발가락에는 모두 꽃무늬 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계림(鷄林)의 남쪽에 백률사(栢栗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에는 부처의 상이 있다. 그것을 만든 시초는 알 수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 하다 민간에서는 이 부처가 일찍이 도리천(桃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法堂)에 들어갈 때 밟았던 돌 위에 난 발자국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 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바로 佛足跡 숭배와 그것의 조형상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또 일본의『약사사 연기(藥師寺 緣起)』에는 백제왕이 보낸 것이라고 하는 불족적석(佛足跡石) 2개, 관음상(觀音像), 홍종(鴻鐘)이 있었다고 하므로 일 찍이 불족적선이 만들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불상을 대신하여 사리를 모신 탑, 금강보좌, 보리수, 불족적 등이 석가 의 모습 대신 표현되어 오다가 석가의 입멸 후 500여 년이 지난 기원 전후 무 렵에 들어서 비로소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는 물론 예배상으로서 불상을 만들고자 하는 요구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상을 만들어도 석가에 대한 신성모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불상의 조성이 가능해질 수 있었 으며 동시에 앞서 말했던 불교 근본주의의 입장이 희미해져가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불교의 교세가 커지면서 많은 불교도들은 신앙의 실체로서 가시적인 대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인도 불교도들은 석가가 열반에 든 후 얼마 동안은 석가의 모 습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석가의 인격적인 교화를 사모했다. 또 직접 석가를 만 나지 못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소식을 생생하게 전해들었고 사리를 모신 탑, 금강보좌, 보리수, 불족적 보륜 등을 예배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부처가 입멸한 지 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오셨던 위대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부처의 모습은 희미해져가고 초인 간적, 초자연적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ㄷ. 여기에 불상을 만들려는 욕구가 따 르게 되었다.
마침내 인도에서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하는데 최초의 불상은 인도의 서북부 간다라(Gandlh ra) 지방과 북부 마투라(Mathrur )지방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마투라는 오래 전부터 종교도시로 알려져 있었으며 델리의 남쪽 갠 지즈 강의 지류인 자무나 강 중간 서안(西岸)에 위치하여 인도 서북부 및 서해 안을 연결하는 대륙간 교통의 요지로서 중개무역의 거점이었다.
마투라의 불교 조상은 인도 고유의 조형성과 소박한 고대 인도 미술의 전통을 계승했다. 간다 라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변경 지역으로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는 실크로드로 나뉘어 인도 내륙을 통과하는 동서교통의 간선로에 인접 하여 예로부터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동시에 동서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던 중요한 지역이다. 또한 마투라와 간다라 두 지역은 쿠샨 제국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간다라의 불상은 그리스 신상(神上)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간다라 미술의 중 요한 중심지 탁실라(Taxilla)를 중심으로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다. 간다라 지방 과 마투라 지방 어느 곳에서 먼저 불상이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 왔으나 대개 거의 같은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결론 에 이르고 있다. 당시의 역사 사정은 인도사에서 가장 불명한 시기로 편년(編年)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의 인도 미술 유품의 제작 연대는 매우 막연하고 불분명하다. 인도 문학 에서 보면 여기에 나타나는 시간도 근단적으로 표현되는 무한한 시간이 아니면 아주 미분화된 미세한 시간이다. 겁(劫, Kalpa)이라든가 찰나(刹那, Ksana)같은 우주적인 시간이다. 인도인들은 명확한 시간에 대한 생각이 희박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도 변화하는 현상보다는 그 현상계 뒤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흘러가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인도의 철학사상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인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자 연히 주변 국가의 기록들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간다라 미술은 그리스 헬레니즘, 고전 로마 미술의 영향이 크고 사실적인 표 현이 두드러지는 한편 추상적이고 동양적인 표현방식으로 변했다. 간다라 미술 은 불탑(佛塔)과 조각이 주로 있고 회화는 남아 있지 않다. 조각은 전기에는 청 회색의 간다라석 불상이 만들어지고 후기에는 쇠퇴해져가던 석조 불상 대신 소 조 불상(塑造佛像)이 만들어지는데 여기에 채색이 가해져서 한층 우아해졌다.
마투라 불상은 인도 전통 미술의 계승이어서 간다라 불상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쿠샨 왕조 이전의 인도적인 육체성이 강조되는 전통을 이어받는다. 마 투라 미술 역시 불상 조각이 주이며 힘있는 표현의 마투라 불상은 굽타기의 조 각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인도의 불교 미술은 아쇼카왕 시대를 출발점으로 하여 상당히 융성하였다. 그 러나 이 시기의 미술은 원시 소승 불교시대의 것이어서 수법이나 양식의 전개 는 있으나 내용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때는 아직 불상이 출현하지 않았던 시대로 서기 1세기에 쿠샨 왕조가 성립된 이후 비로소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고 간다라 및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마투라, 사르나드, 아마라바티 등 인도 전 지역과 중앙아시아, 서역, 중국, 우리나라에까지 이르게 된다.

쿠샨 제국이 몰락 한 후 굽타왕조가 일어나 그 초기에 불교는 또 한번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전시 대의 불교 미술의 집약으로서 굽타의 불상은 아시아 전역에서 전형적인 모델이 된다. 굽타 불상은 마투라 불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간다 라적인 요소도 갖고 있다. 이후 8세기에 들어서 밀교가 일어나 11세기 또는 12 세기까지 지속된다. 이와 같이 인도 불교 미술은 중앙아시아, 서역,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이르게 된다.

…….. 한국불교미술사 김영극 저, 솔 출판사 중에서 ………

모형작업



위의 석불암 본존불 모형작업은 작업장을 옮기는 관계로 석고작업 전에 촬영한 것이다. 틈틈이 10개월 동안 작업을 하면서 인체 해부학이 방해 요인이었다. 전체적윤곽은 어른의 인체지만, 상호(얼굴)와 가슴 손과 발은 어린아이의 피부로 덮혀있었다.

마무리 작업단계에 있어서 새로운 사실은 인체구조를 전혀 무시한 조형이 아니라, 인체골격구조를 정학하게 지키면서 그것을 초월한 조형을 느낄수 있었다. 숨막히는 긴장감과 이완 끝없는 선의 흐름의 종교적 예술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토함산 석불암 유리벽 밖에서 본존불을 연구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어서 사진의 편각에서 오는 오차 때문에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음을 절감 하였다.

석불암은 T.V나 사진으로는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석굴암을 촬영할 수 있는 거리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근거리의 피사체는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상호는 상호는 사진에서 보는것 보다 더 크며 어깨에서 내려오는 팔의 각도는 실제로는 더 수직에 가깝다.

조형 작업에서 이러한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른 팔이 내려 오는 항마촉지인은, 수직으로 내려오면 우리들에게
긴장감을 보여 주지만, 밖으로 경사가 졌을 때에는 원래의 항마촉지인의 의미와는 다르게 편안함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 안에서만 석불암을 바라 볼 뿐이다.모든 과학과 이론을 동원 하더라도 석불암은 말없이 석불암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전체로서 석불암을 바라볼 수 있다면, 석불암의 소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역사과학관

신라 당시의 자연통풍으로 사용했던 감실속의 환기구멍 10개는 어디로 가고, 감옥의 시멘트 벽처럼 이중의 철옹성만이 자리 잡고 있다.
기하학적 수리 원리의 입면도와 평면도. 석굴암은 정삼각형,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등 현대의 과학도 풀지 못할 정도로 기하학적 수리가 완벽한 건축물이다.
쐐기돌을 길게 뺀 이유는 위에서 누르는 하중을 지렛대의 원리로 들어올려 돔형의 지붕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궁륭의 판석과 쐐기돌이 만나는 궁륭각도는 구심점에 방사선으로 모아지게 하였다.
전실의 펼침과 구부림은 석굴암의 기본 구조를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따라 달라 질 수가 있다.
석굴암이 아미타불인지, 석가불인지의 그 기본 교리를 밝히기 위해 원리를 탐구하기도 한다.
궁륭(돔)부에 튀어 나온 쐐기돌은 무슨 기능을 하고 있는 가를 알기 위해, 고대 물리학의 기본인 균형의 역학적 원리를 응용하여 그 모형을 만들었다.
석굴암 제작 과정의 상상도. 석굴암은 화강암을 재료로한 인공 석굴이다.  

신라 역사 과학관의 석우일 사장

경주시 하동 201번지, 경주민속공예촌 안쪽 깊숙한 곳에 5년전에 개관한 ‘신라역사과학관'(0561-745-4998)이 있다. 개관 당시의 이름은 ‘동악미술관’ 이다. 이 과학관은 경주시민, 진짜 경주사람의 땀과 의지로 세워진 경주 최고의 교육 기관이다. 1991년 ‘석굴암 전문 회의’ 때 모든 전문가들이 이 전시장을 견학하고는 큰 감동을 받고 그 회의 결과에 이러한 교육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 놓았던 것이다. ‘신라역사과학관’은 서울공예사라는 목조각을 수출하는 석우일 (昔宇一, 55세) 사장의 사설 미술관이다. 석사장은 경주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뒤 줄곳 석재상을 해온 분이다. 그 이상 특별한 이력이없다. 있다면 누구 보다도 경주를 사랑했고 신라인의 슬기로움에 감복하여 그 위대한 유산을 우리시대에 살아있는 교육장으로 만들어 보는 꿈을 갇고 있었다. …… ‘신라역사과학관’ 의 석굴사석굴 모형도는 5분의 1 축척으로 1개, 10분의 1축척으로 7개를 제작하여 석굴의 내부와 외부 구조, 그리고 현재의 상태와 원형의 추정, 학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실의 전개와 꺽임의 문제, 광창의 유무 문제 등을 모두 수용하여 그것을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내가 복잡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석굴구조의 과학성과 치밀함은 이 8개의 모형으로써 완벽하게 설명된다. 석굴사 석굴을 답사하기 전에, 또는 답사한 후에 반드시 여기를 거쳐가야만 그 신비에 접근해갈 수 있다. 석굴사 석굴의 교육전시장을 만들어 낸 것도 관 (官)이 아니고 민(民)이 었다. 하루에도 천만 원의 입장료를 징수하여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현찰수입이 가장 많은 석불사의 석굴을 관리하는 석굴암과 문화재관리국이관람객을 위하여 한 일은 결국 유리창으로 막은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 (유홍준 저 창작과 비평사) 에서